“응급실 기록도 AI가 쓴다”…세브란스, 내부망 LLM로 진료시간 확보
응급실에서 분 단위로 생사가 갈리는 상황에서 진료기록 작성 업무를 인공지능이 대신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연구진이 내부망에서만 작동하는 대규모 언어 모델 기반 기록 자동화 시스템을 구현하면서, 의사는 진료에 더 집중하고 AI는 퇴실 기록지를 작성하는 역할 분담 구조가 현실화되고 있다. 응급실 특성상 방대한 양의 의료정보를 실시간으로 다루는 만큼, 데이터 유출을 막으면서도 문서 품질을 높인 이번 기술은 의료 AI 상용화 경쟁의 새로운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세브란스병원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응급의학교실 김지훈 교수, 의생명시스템정보학교실 유승찬 교수, 송지우 학생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응급실 퇴실 기록 자동 작성 AI 모델 와이낫을 개발했다고 4일 밝혔다. 와이낫은 의료법상 필수 문서인 응급환자진료기록부를 자동으로 초안 작성해 주는 시스템으로, 의사는 내용 검토와 최종 승인만 거치면 된다. 연구진은 이 모델을 실제 상급종합병원 응급실 환경에 적용해 효율과 안전성을 함께 검증했다.

응급환자진료기록부에는 내원 사유, 주요 증상, 검사 결과, 처치 내역, 경과, 전원 여부, 퇴실 결정 사유 등 진료 전 과정이 구조화된 형태로 담겨야 한다. 응급실 의료진은 빠른 검사와 처치를 반복하면서도 이 문서를 누락 없이 작성해야 하므로, 행정 업무 부담이 상당했다. 특히 환자 수가 집중되는 시간대에는 의사가 직접 문서를 입력하는 과정이 진료 시간 확보의 걸림돌로 지적돼 왔다. 연구진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언어 생성 AI로 해결하고자 했다.
와이낫의 핵심은 온사이트 대규모 언어 모델과 경량 트랜스포머 기반 모델 라마3 8B를 병원 내부 인프라에 최적화했다는 점이다. 대규모 언어 모델은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해 맥락에 맞는 문장을 생성하는 기술로, 챗봇이나 자동 요약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하지만 다수 상용 모델은 외부 클라우드 서버와의 통신을 전제로 설계돼 의료기관에서 사용 시 환자 건강정보가 외부로 전송될 위험이 있었다. 특히 진단 내용, 처치 내역, 개인식별정보 등 고위험 데이터가 포함된 응급실 기록은 국내외 개인정보 보호 규제 상 가장 민감한 영역에 속한다.
연구진은 이러한 한계를 피하기 위해 외부 네트워크와 물리적으로 분리된 온사이트 LLM 구조를 채택했다. 병원 내부 서버에 모델을 직접 탑재해 응급실 전자의무기록 시스템과 연동하고, 생성된 데이터가 병원 경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설계했다. 동시에 라마3 8B와 같은 경량 트랜스포머 모델을 기반으로 파라미터 수와 연산량을 줄여, 고성능 GPU 장비가 제한적인 의료기관 환경에서도 실시간 응답이 가능하도록 최적화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모델 축소에도 불구하고 문장 생성 품질은 상위권 상용 LLM과 견줄 수준으로 유지됐다.
실제 활용 성능도 수치로 입증됐다. 국내 2400병상 규모 상급종합병원 응급의학과 의사 6명을 대상으로 와이낫을 적용한 결과, 응급환자진료기록부 작성 시간은 평균 69.5초에서 32.0초로 줄어 50퍼센트 이상 단축됐다. 진료 흐름을 끊지 않고 기록을 마무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시간이 줄어들면서, 의사가 직접 타이핑에 쏟던 여유 시간이 환자 진료와 의사결정에 재배치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응급실처럼 분당 환자 유입이 반복되는 환경에서는 누적 효율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품질 측면에서도 AI 보조 기록이 수기 기록을 앞선 것으로 평가됐다. 연구진은 AI가 생성한 문서와 의사가 직접 작성한 문서를 섞어 응급의학과 전문의 3명에게 무작위로 제시한 뒤, 완전성, 정확성, 간결성, 임상적 유용성 등 4개 항목으로 비교 평가를 진행했다. 그 결과 네 가지 모든 항목에서 AI 보조 기록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누락 없이 필요한 정보가 포함돼 있고, 불필요한 중복 표현을 줄여 가독성이 개선된 데다, 실제 임상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정보 구조를 잘 반영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번 기술은 기존 클라우드 기반 의료 문서 생성 서비스의 구조적 약점을 정면으로 피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외에서는 이미 응급실과 외래 진료실에서 의사 음성을 실시간으로 받아 자동 차팅을 수행하는 서비스들이 등장했지만, 상당수가 외부 서버 전송과 텍스트 저장을 수반해 데이터 주권과 개인정보 보호 논란을 낳았다. 유럽연합의 일반개인정보보호법이나 미국 의료정보보호법과 같은 강력한 규제 하에서는 의료 AI 기업들이 별도 인증과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국내에서도 의료법과 개인정보보호법,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가이드라인 등에서 건강정보를 민감정보로 분류해 엄격히 관리하고 있으며, 클라우드 이용 시에도 사전 위험 평가와 암호화 등 추가 조치를 요구한다. 온사이트 LLM 구조는 애초에 데이터가 외부로 나가지 않는 만큼, 규제 리스크를 대폭 줄이고 병원 내부 정보보호 정책만으로 관리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응급실 현장에서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AI 문서 자동화 모델의 요건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와이낫은 현재 응급의학과 중심으로 설계됐지만, 구조화된 입력 데이터를 기반으로 서술형 보고서를 생성하는 특성상 다른 진료과나 검사실, 중환자실 등으로 확장될 소지도 크다. 유승찬 교수는 다른 과에서도 활용이 가능하다고 언급하며, 다만 각 진료과의 특수한 용어 체계와 문서 구조에 맞게 추가 학습과 튜닝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의료 AI 특성상 최종 책임은 의사에게 있는 만큼, 모델이 작성한 문서는 반드시 전문의 검토를 거치는 구조를 유지하겠다는 점도 강조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의료 텍스트 생성 AI를 둘러싼 경쟁이 이미 가속화되는 중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LLM을 활용해 진료 기록, 보험 청구 서류, 임상 경과 보고 등을 자동 작성하는 솔루션이 병원 IT 시스템과 연동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서비스가 범용 클라우드 인프라 위에서 돌아가고 있어, 각국 규제기관이 데이터 저장 위치와 접근 통제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추세다. 이번 세브란스 모델은 한국 의료기관이 자체 데이터센터와 내부망을 활용해 LLM을 운영하는 레퍼런스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해외 클라우드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과도 맞닿아 있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자마 네트워크 오픈 최신호에 게재됐다. 저널은 의학 분야에서 디지털 헬스와 의료정보학 연구를 활발히 다루는 매체로, 응급실 기록 자동화 LLM을 실제 임상 환경에서 평가한 사례를 소개하며 의료 현장 도입 가능성에 주목했다. 논문에는 기록 시간 단축뿐 아니라 의사 만족도, 오류 발생률, 문서 구조 일관성 등 다양한 정량지표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지훈 교수는 AI 기반 응급환자진료기록 작성이 속도와 품질 양쪽에서 기존 수기 방식보다 우위에 있다고 설명하며, 내부망 운용을 통해 환자정보 보호 요건도 충족했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의료 현장 도입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오류 가능성에 대비해 감시 체계를 유지하고, 지속적인 모델 보완과 재학습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에서는 응급실 기록 자동화 사례가 원내 LLM 활용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아직까지 의료법상 진료기록 작성 책임 주체는 인간 의사로 규정돼 있어, AI가 작성한 문서에 대한 법적 책임과 오류 발생 시 대응 체계를 둘러싼 논의가 추가로 필요하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이번 기술이 실제 응급실과 다른 진료과로 얼마나 빠르게 확산될지, 그리고 의료 규제 환경과 병원 IT 인프라 변화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