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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블랙박스, 고의 훼손 증거로…디지털 포렌식이 바꾸는 분쟁 처리

윤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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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용 블랙박스와 디지털 포렌식 기술이 일상 속 분쟁 해결 방식을 바꾸고 있다. 최근 공영주차장에서 발생한 신차 훼손 사건에서 블랙박스 영상이 가해자 특정과 수사 개시의 핵심 단서가 되면서, 센서와 카메라가 결합된 차량 데이터가 사실상 ‘이동형 감시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고해상도 촬영과 인공지능 기반 분석 기술 고도화가 진행되면서 향후 교통사고뿐 아니라 각종 재산범죄 처리에서도 디지털 증거 의존도가 더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제보자가 공개한 영상에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성이 주차된 차량 옆으로 다가와 쭈그려 앉은 뒤, 날카로운 물체로 차체를 긁고 현장을 떠나는 장면이 선명히 담겼다. 출고 3개월 신차에 약 10센티미터 길이의 스크래치가 발생했고, 수리 견적은 약 90만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피해 차주는 블랙박스 영상을 바탕으로 경찰에 신고했고, 같은 피시방을 드나들던 인물이라는 점을 기억해낸 후 재방문 과정에서 영상 속 남성과 동일 인물을 발견해 경찰에 알렸다.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남성을 검거했고, 영상은 피의자 특정과 범행 정황 입증에 직접적 자료가 됐다.

이 사례는 차량용 블랙박스가 단순 사고 기록 장비를 넘어 고해상도 영상과 위치·시간 정보가 결합된 디지털 포렌식 소스라는 점을 보여준다. 최근 시판되는 블랙박스는 전방·후방·측면을 동시에 촬영하는 멀티 채널 구조, 야간·저조도 환경에서도 번호판 식별이 가능한 고감도 이미지 센서, 충격 감지 시 자동 저장 기능을 기본 탑재하고 있다. 가속도 센서로 충격 강도와 방향을 기록하고, GPS 신호로 위치와 속도를 저장해 물리적 충돌뿐 아니라 주차 중 접근 인물의 동선 파악에도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차량 훼손이나 경미한 접촉 사고처럼 목격자가 적은 상황에서는 영상과 센서 데이터가 사실상 유일한 객관 자료가 된다. 프레임별 시간 스탬프, 영상 속 피사체의 행동 패턴, 주변 차량 이동 여부 등을 종합 분석하면, 고의성과 우발성, 전후 사정을 상대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보험사와 수사기관은 이 데이터를 토대로 손해배상 범위와 형사 책임 여부를 판단하고, 공업사는 손상 부위와 각도에 따라 수리 공정을 설계한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는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블랙박스를 차량 내장형 텔레매틱스 시스템과 연동하는 방향으로 진화시키고 있다. 차량 제어 유닛에 저장되는 로그 데이터, 에어백 컨트롤러의 이벤트 데이터 레코더, 차선 유지 보조와 전방 충돌 경고용 카메라 영상이 통합 관리되면서 사실상 ‘주행 데이터 박스’가 마련되는 구조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사고 발생 시 이 데이터를 추출해 과실 비율 산정에 활용하는 디지털 포렌식 서비스가 확산 중이다.

 

국내에서도 보험업계는 블랙박스와 운전습관 기반 UBI 상품을 결합해, 급가속·급제동·야간 운행 비율 등을 반영한 맞춤형 요율 체계를 확대하는 추세다. 주차장·공공시설 사업자는 AI 기반 영상분석 솔루션을 도입해 번호판 인식, 이상 행동 감지, 장기 주차 탐지 등을 구현하고 있으며, 일부 시스템은 차량이 주차된 상태에서 일정 범위 내 사람 움직임이 감지되면 자동으로 고화질 녹화를 시작하도록 설계된다. 이러한 기술 융합은 범죄 예방과 사후 추적 모두에 기여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차량과 주차장 인프라 전반이 방대한 양의 영상을 상시 수집하는 구조가 되면서, 개인정보 보호와 감시 사회 우려도 커지는 양상이다. 차주뿐 아니라 주변 보행자의 얼굴, 이동 동선, 차량 번호 등이 대량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현행 개인정보보호 규정은 영상을 수집하는 주체에게 촬영 목적과 보관 기간 안내, 접근 통제, 암호화 저장을 요구하고 있으나, 개인 소유 블랙박스의 경우 관리 책임과 범위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사기관의 데이터 제출 요구와 개인의 프라이버시 권리 사이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도 향후 논쟁 지점이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영상과 센서 데이터의 증거력 확대가 불가피한 흐름이라고 보면서도, 기술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디지털 포렌식 연구자들은 영상 조작 여부를 검증하는 위변조 탐지 알고리즘, 번호판과 얼굴을 자동 비식별 처리하는 프라이버시 보호 기술, 필요 최소한 데이터만 선별 제공하는 차등 접근 체계를 중요한 수단으로 꼽는다. 한 정보보안 전문가는 “차량과 도시는 이미 촘촘한 센서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며 “데이터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조건에서 접근하고 활용하는지가 분쟁의 핵심 쟁점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전 공영주차장 신차 훼손 사건에서 보듯, 블랙박스와 디지털 포렌식은 분쟁의 사실관계를 가르는 기준점이 되고 있다. 산업계는 영상 해상도 경쟁을 넘어, 데이터 신뢰성과 프라이버시 보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기술과 제도 설계가 향후 시장 판도를 좌우할 수 있는 요소로 보고 있다. 기술과 윤리, 산업과 규제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가 일상 속 디지털 증거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가늠하는 새로운 조건이 되고 있다.

윤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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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디지털포렌식#차량센서데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