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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AI 월드모델”…정부, 제조강점 앞세워 G3 승부수

신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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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주도권 경쟁이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한국이 제조 강점을 앞세운 피지컬AI 전략으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내년 6월까지 세계 톱10 수준의 독자 AI 모델을 배출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데 이어, GPU 100만장 규모 인프라와 국산 NPU 중심의 월드 모델 생태계 구축 방침까지 내놓으면서 글로벌 AI 3대 강국 도약을 위한 구체적 청사진이 드러나는 모양새다. 업계에서는 이번 방향 전환을 미중 양강 체제 속에서 한국의 AI 기술 자립 여부를 가를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겸 부총리는 18일 대한상공회의소 초청 조찬 강연에서 세계 상위 20위권 AI 모델이 사실상 미국과 중국에 집중돼 있다고 진단했다. 배 부총리는 현재 글로벌 상위권 AI 모델 대부분이 미중에서 나오고 있다며 한국이 기술 종속을 피하려면 한두 개를 넘어 최소 4~5개의 독자 모델을 상위권에 올려야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미중 구도 안에서 중국의 추격을 경계했다. 미국이 빅테크를 중심으로 소프트웨어형 거대언어모델 개발에 집중하는 사이, 중국은 제조 및 로봇, 자율주행, 물류 등 물리적 공간에서 작동하는 피지컬AI 인프라를 빠르게 확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뿐 아니라 센서, 로봇, 엣지 컴퓨팅 등 하드웨어 결합 역량에서 중국이 우위를 확보할 가능성도 있다고 평가했다.

 

배 부총리가 강조한 피지컬AI는 디지털 환경에 한정된 기존 거대언어모델과 달리, 현실 세계의 복잡한 물리 환경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AI를 의미한다. 핵심 기술로 꼽힌 월드 모델은 공장 설비 동작, 로봇 팔의 궤적, 온도·진동·압력 같은 센서 데이터, 작업자 동선 등 다양한 물리 변수를 통합해 시뮬레이션하는 모델이다. 텍스트와 이미지 위주로 학습하던 기존 모델과 달리, 실제 공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비 고장 시점 예측, 생산 공정 최적화, 안전사고 위험 탐지까지 아우르는 것이 특징이다.

 

과기정통부는 이런 월드 모델을 제조 특화 파운데이션 모델로 발전시켜 GPU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에서 개발 중인 신경망처리장치 기반 연산 구조와 결합할 계획이다. GPU는 대규모 병렬 연산에 특화된 반도체로 현재 대형 AI 학습의 핵심 인프라이지만, 공급 부족과 가격 급등으로 병목 요인이 되고 있다. 반면 NPU는 AI 연산 전용 구조로 전력 효율과 비용 측면에서 유리해, 공장 설비나 로봇에 직접 탑재하는 엣지 AI 구현에 적합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내년 6월까지 세계 톱10 수준 성능을 목표로 5개 AI 모델 컨소시엄을 지원 중이다. 언어 특화, 멀티모달, 산업 특화 등 여러 유형의 파운데이션 모델을 병렬로 육성해 독자 모델 포트폴리오를 넓히겠다는 전략이다. 배 부총리는 언어 장벽이 의미를 잃어가는 환경에서 한국어 특화 전략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며,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는 서비스 경쟁력과 산업용 모델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인프라 측면의 투자 계획도 제시했다. 정부는 2028년까지 GPU 5만장을 조기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100만장 이상 규모의 AI 연산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국내 대학·연구소·스타트업·중견 제조기업 등이 대규모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공용 연산 기반이 되며, 글로벌 클라우드 사업자나 빅테크에 의존하던 학습 환경을 일정 부분 국내로 이전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피지컬AI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자율주행, 물류 로봇, 제조용 코봇에 최적화된 월드 모델 연구가 진행 중이고, 오픈AI와 연계된 로봇 스타트업, 테슬라 등도 로봇과 차량에 특화된 물리 세계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중국은 국영 기업과 빅테크를 중심으로 스마트팩토리, 스마트시티 프로젝트에 피지컬AI를 확산시키며 대규모 현장 데이터를 빠르게 축적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 자동화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공정 데이터 표준화와 데이터 전 주기 관리 체계에서는 아직 격차가 존재한다는 평가가 많다.

 

정책·재정 지원 규모도 대폭 확대된다. 정부는 내년 AI 예산을 올해의 약 3배 수준인 9조9000억원으로 편성했고, 30조원 규모 투자 펀드도 조성해 민간 자본과 함께 대규모 프로젝트를 뒷받침할 계획이다. 내년부터는 범부처 AI 대전환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해 제조, 의료, 금융, 교육 등 전 산업에 거쳐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서비스를 확산한다는 구상이다.

 

배 부총리는 한국이 피지컬AI 강국으로 도약하려면 데이터 구축 전략부터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장, 물류센터, 건설 현장 등에서 발생하는 이기종 센서 데이터를 통합 관리하고, 표준화된 형식으로 학습 가능한 형태로 가공하지 않으면 월드 모델 고도화에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제조,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잠재력이 크지만 현재 수준의 데이터 인프라와 투자 속도로는 피지컬AI 선도국 진입이 어렵다며 체계적인 데이터 수집·가공·활용 체계를 주문했다.

 

산업계는 이번 피지컬AI·월드 모델 육성 방향을 계기로 정부와 기업 간 협력이 강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비롯해 김정태 전주상공회의소 회장, 박승희 삼성전자 사장, 박일준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이형희 SK 부회장, 조현상 HS효성 부회장, 김동욱 현대차 부사장, 박준성 LG 부사장 등 주요 기업인 250여 명이 참석해 과기정통부 정책 방향을 공유했다.

 

배 부총리는 글로벌 AI 3대 강국 도약은 순위 경쟁이 아니라 기술적 자생력 확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중 양강 구도 속에서 한국이 제조 기반 피지컬AI와 월드 모델에서 차별화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지에 산업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고 덧붙였다. 산업계는 이번 전략이 실제 현장에 안착해 AI 기술과 제조 구조 전환을 동시에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신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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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훈#피지컬ai#월드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