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 위로 빛이 번진다”…해운대에서 찾는 계절의 쉼과 예술의 온기
겨울 바다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여름에만 떠오르던 해운대였지만, 지금은 찬 공기와 잔잔한 파도 소리를 즐기려는 이들의 계절 맞춤 산책 코스가 됐다. 사람들은 모래사장 대신 빛과 예술, 고요한 어촌 풍경을 곁들인 조금 다른 겨울 바다를 찾고 있다.
요즘 해운대 일대에서는 두 가지 풍경이 동시에 눈에 들어온다. 숨은 어촌 마을 청사포에서 느리게 흐르는 겨울 바다의 리듬, 그리고 도심 속 미술관과 영화관에서 마주하는 따뜻한 예술의 공기다. 파도 앞에 서서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하던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실내 전시와 상영관으로 자리를 옮겨 또 다른 감정을 채운다. 자연스럽게 하루의 동선이 바다와 예술 사이를 오가며 짜여진다.

청사포는 이런 겨울 여행의 시작점처럼 느껴진다. 해운대구 중동, 달맞이길 아래로 내려가면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작은 포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예부터 물고기가 많아 신선한 횟감으로 사랑받았고, 지금도 붕장어구이와 숯불조개구이 냄새가 바닷바람을 타고 퍼진다. 방파제 위로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의 실루엣이 길게 늘어서고, 파도 부딪히는 소리만이 낮게 배경음을 깔듯 이어진다. 망부송과 해마루 정자에 서면 푸른 수평선과 겨울 하늘이 맞닿는 풍경이 시야 가득 펼쳐져, 말 대신 깊게 숨을 들이쉬게 만든다. 누군가는 이곳을 두고 “겨울에도 어깨 힘을 빼고 머무를 수 있는 바다”라고 표현한다.
조금 더 도심 쪽으로 들어오면 해운대 해변이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한국 8경으로 꼽히는 이곳은 여름엔 수많은 피서객으로 붐비지만, 겨울에는 오히려 해운대의 본래 결이 드러난다. 해운대구 우동에 자리한 넓은 백사장은 발자국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만큼 한산해지고, 파도는 한층 차분한 톤으로 모래를 적신다. 신라 말 학자 최치원이 감탄을 새겨 넣었던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계절을 건너는 시간의 층위를 조용히 증명한다. 예전 온천장으로도 알려졌던 이 지역은 지금, 잘 정비된 교통망과 편의시설 덕분에 짧은 일정으로도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도심 속 겨울 휴식지로 다시 읽히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멀리 가지 않아도 마음을 식힐 공간이 생겼다”고 느낀다.
이런 변화는 실내 공간에서의 문화 경험에서도 이어진다. 해운대구 우동에 자리한 뮤지엄 원은 추운 계절에 더욱 찾게 되는 현대 미술관이다. 현재 진행 중인 전시 ‘다시, 낭만의 시대’는 2025년 11월 15일부터 2026년 10월 11일까지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곳에서는 빛과 소리, 움직임이 한 화면 안에서 겹겹이 이어지며, 관람객이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만들어낸다. 겨울 바다의 차가운 공기를 마주하다가 실내로 들어서면 온도뿐 아니라 감정의 결도 달라진다. 눈앞을 가득 채운 색과 리듬이 몸을 감싸면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게 된다”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영화의전당 역시 해운대의 겨울 루트를 완성하는 공간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이 건물은 우동 도심 한가운데에서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거대한 빅루프와 스몰루프 구조는 낮에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뒤흔드는 조형미로, 밤이 되면 수많은 조명이 켜지며 화려한 빛의 천장으로 변신한다. 영화 상영은 물론 공연,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어져, 바다에서 불어온 서늘한 공기를 잔잔한 이야기와 음악으로 데워 준다. 방문객들은 “춥지 않게, 그러나 계절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코스”라며 겨울 여행 목록에 이곳을 올리고 있다.
여행의 이유를 물으면 사람들은 더 이상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만을 말하지 않는다. 차분한 바다를 보며 마음을 비우고, 실내 전시와 영화 속에서 각자의 감정을 채우려는 흐름이 강해졌다. 트렌드 분석가들은 이런 움직임을 두고 “휴식의 방식이 빠른 소비에서 천천히 감각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 설명한다. 자연과 예술을 함께 찾는 여정이야말로 피로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휴식 공식이라는 해석이다.
댓글과 커뮤니티 반응도 흥미롭다. “겨울 해운대가 이렇게 조용한 줄 몰랐다”, “청사포에서 해 질 녘까지 있다가 영화의전당으로 넘어가니 하루가 꽉 찬 느낌이었다”는 경험담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춥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덜 춥다”고 적어 두기도 한다. 바다는 계절에 맞게 차가워졌지만, 그 곁에서 마주한 예술과 풍경이 오히려 사람들의 체온을 지켜 주는 셈이다.
부산 해운대의 겨울은 거창한 이벤트 대신, 천천히 걷고 오래 바라보는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모래와 파도, 빛과 스크린 사이를 오가는 이 계절의 동선은 거창하지 않아도 충분히 풍요롭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