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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앞당기는 핵융합 전력생산…정부 2030년대 실증 예고

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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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융합에너지 기술이 전력 산업의 시간표를 다시 쓰고 있다. 정부가 2050년대 이후로 잡혀 있던 상업용 핵융합 전력 생산 목표를 2030년대로 20년가량 앞당기는 로드맵을 확정하면서다. 핵융합연구장치 KSTAR에 축적된 운전 데이터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설계와 운전 최적화를 가속하고, 소형 실증로를 앞세워 상용화 필수 기술을 단계적으로 검증하겠다는 구상이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번 계획을 글로벌 민간 주도 핵융합 경쟁에서 한국이 뒤처지지 않기 위한 ‘속도전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9일 제22차 국가핵융합위원회에서 핵융합에너지 실현 가속화를 위한 핵융합 핵심기술 개발 로드맵을 심의·의결했다고 밝혔다. 이 로드맵에 따라 정부는 한국형 혁신 핵융합로 개발에 착수하고, 전력 생산 실증에 필수적인 8대 핵심기술 확보를 공식 목표로 제시했다. 기존 국가 계획에서 2050년대 이후로 잡혀 있던 핵융합 전력 생산 시점을 2030년대로 앞당겨, 2030년대 중 전력생산 실증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핵융합은 태양이 에너지를 내는 원리처럼 가벼운 원자핵을 고온에서 융합시켜 거대한 에너지를 얻는 기술로, 이산화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고 방사성 폐기물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차세대 기저전원 후보로 꼽힌다. 문제는 수억 도의 플라즈마를 안정적으로 가두고 제어하는 것이 까다로워 상용화 시점이 늘 멀리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특히 초전도 자석, 고내구성 소재, 고출력 가열 장치 등 공학적 난제를 동시에 풀어야 해 대형 국제공동연구 중심으로만 추진돼 왔다.

 

정부가 이번에 방향을 튼 지점은, 기존의 대형 장치 중심 개발에서 벗어나 소형이면서도 설계와 운전이 빠른 혁신형 실증로를 별도로 개발해 상용화에 필요한 기술 패키지를 조기 검증하겠다는 점이다. 한국형 혁신 핵융합로는 전력생산 실증을 목표로 하는 실증용 장치로 정의되며, 2026년 개념설계에 착수할 계획이다. 아직 구체 사양과 건설 일정은 개념설계를 통해 확정되지만, 전력 생산 기능과 상용화 필수요건을 우선 검증하는 소형 장치로 설계한다는 방향이 제시됐다.

 

이번 로드맵에서 제시한 8대 핵심기술은 크게 소형화 기술 고도화 축과 전력 생산 기술 확보 축으로 나뉜다. 소형화 기술 고도화 분야에는 노심 플라즈마 제어, 혁신형 디버터, 고성능 가열 및 전류구동, 초전도 자석 등 KSTAR 운전 경험을 토대로 한 장치 운전 핵심기술이 포함된다. 정부는 2030년까지 이들 기술을 집중 개발해 소형 실증로에 적용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전력 생산 기술 확보 분야에서는 증식 블랑켓, 핵융합용 고내방사선 소재, 연료 주기, 안전·인허가 체계를 4대 축으로 제시했다. 증식 블랑켓은 핵융합로 내부에서 중성자를 이용해 연료가 되는 삼중수소를 생산하고 동시에 열을 회수하는 모듈로, 실질적인 전력생산 효율과 경제성을 좌우하는 장치다. 연료 주기 기술은 중수소와 삼중수소 연료를 생산·회수·정제하고 방사선 안전을 확보하는 공정 전반을 아우른다. 정부는 2035년까지 이들 전력 생산 기술을 실증 수준으로 끌어올려, 혁신 핵융합로를 통해 전력 생산 가능성을 입증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특히 이번 로드맵에서 강조된 대목은 인공지능과 핵융합 기술의 융합이다. 과기정통부는 미국의 제네시스 미션 등 글로벌 민간 주도 핵융합 프로젝트와의 경쟁 구도 속에서, KSTAR가 지난 수년간 축적해온 방대한 운전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플라즈마 거동 예측과 운전 조건 탐색을 가속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글로벌 연구계에서는 딥러닝을 활용해 플라즈마 불안정성을 사전 예측하거나 최적 운전 조건을 자동 탐색하는 시도가 활발하다. 한국은 KSTAR라는 초전도 토카막 장치 운전 경험을 바탕으로 학습 데이터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있어, 이를 소형 혁신로 설계와 운전에 직접 반영하겠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핵융합 경쟁은 이미 민간 기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이다.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스타트업과 민간 기업이 자기구속형, 레이저 관성구속형, 고자기장 초전도 자석 기반 등 다양한 접근 방식으로 상용화 시기를 앞당기려 하고 있다. 제네시스 미션과 같은 미국 측 프로젝트는 상용로와 연계 가능한 전력급 실증을 2030년대 초반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유럽과 일본도 대형 국제공동연구와 민간 투자를 병행하는 전략을 내놓고 있다. 국내에서는 KSTAR를 통해 초고온 플라즈마를 장시간 유지한 경험이 있지만, 상용화와 직결되는 블랑켓, 연료 주기, 대형 시스템 엔지니어링 역량은 아직 개척 단계라는 평가가 많다.

 

이에 정부는 로드맵 이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약 1조5000억 원 규모의 핵심 기술개발 및 첨단 실증 연구인프라 구축 사업을 추진 중이다. 예비타당성 조사를 이미 제출한 상태로, 통과 시 한국형 혁신 핵융합로 설계·건설과 8대 핵심기술 실증에 필요한 장기 재원이 마련될 전망이다. 더불어 핵융합에너지개발진흥법 개정을 통해 산업 지원 근거를 강화하고, 산학연 원팀 추진체계를 구축해 연구개발과 산업화를 동시에 겨냥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규제와 인허가 측면에서도 선제적 준비가 예고됐다. 핵융합발전은 고에너지 플라즈마와 방사성 물질을 다루는 만큼 원자력 안전 규제와 별도의 기준 정립이 필요하다. 정부는 안전·인허가를 8대 핵심기술 가운데 하나로 명시하고, 기술 개발 초기 단계부터 규제기관, 연구기관, 산업계가 함께 표준과 인증 체계를 설계하는 구조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의료나 원전 분야에서 나타났던 ‘기술 후 규제 추격’ 패턴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연구·산업 생태계 조성도 로드맵의 핵심 축이다. 정부는 5년 단위 연동계획을 수립해 기술 성숙도에 맞춰 단계적으로 예산과 과제를 조정하고, 산학연 전문가로 구성된 이행점검단을 운영해 로드맵 이행 상황을 상시 점검하기로 했다. 특히 핵융합 특화 인력 양성과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참여 확대를 통해 장기적으로는 독자적인 설계·제작·운영 역량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기술 선도국과의 전략적 글로벌 협력도 병행해 국제공동실험, 부품 공급망 참여 등 다양한 연계를 모색한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로드맵이 일정 단축과 함께 ‘선택과 집중’ 전략을 분명히 한 데 의미를 둔다. 대형 국제공동연구에만 의존할 경우 상업용 전력 생산 시점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구조에서, 소형 혁신로와 AI 기반 설계 최적화를 앞세워 우리에게 강점이 있는 영역을 빠르게 성숙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했다는 평가다. 다만 2030년대 전력생산 실증이라는 목표가 다소 공격적 일정인 만큼, 예산 집행과 인력 수급,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까지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복합 과제’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은 핵융합을 과학기술 기반 국가 혁신성장의 핵심 분야이자 전략기술로 규정하며, 2030년대 핵융합 전력생산 실증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AI 시대 전력수요 급증에 대응하고 미래 에너지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산학연 역량을 결집하겠다고 강조했다. 산업계와 연구계는 정부의 로드맵이 실제 예산과 제도로 뒷받침되며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분위기다.

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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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핵융합#ks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