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 더 낮추면 R&D도 위축”…정부 개편안, K바이오 투자 흔든다
제네릭 가격을 오리지널 의약품의 40퍼센트대로 낮추려는 정부의 약가 제도 개편이 제약·바이오 산업 전체의 투자 구조를 뒤흔들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당장은 건강보험 재정 절감을 목표로 하지만, 제네릭 수익성 악화가 연구개발과 설비투자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2012년 대규모 일괄 약가 인하 당시 장기적으로 약제비 지출과 환자 부담이 오히려 증가했다는 분석 결과까지 다시 부각되면서, 정부와 업계가 예측 가능한 약가 체계와 공식 소통 창구를 구축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는 분위기다.
정부는 제네릭과 특허만료 의약품의 기준 약가를 기존 오리지널 대비 53.55퍼센트에서 40퍼센트대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적용 시점은 내년 7월 전후가 거론된다. 업계는 연말 내내 비공개 회의를 이어가며 투자와 연구개발 전략 전면 재조정을 검토하고 있다. 제약사의 현금창출 기반인 제네릭 마진이 대폭 줄어들면 신약 파이프라인 확대와 바이오 인프라 투자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현행 약가 체계가 사용량 약가 연동제와 실거래가 약가인하 등 여러 규제가 분절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라는 점이 산업계 불만을 키운다. 동일 품목에 대해 서로 다른 제도가 중복 적용되며 실제 인하율이 사전에 예측하기 힘든 수준으로 커지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어서다. 기업 입장에서는 장기 R&D 계획과 글로벌 임상 설계에 필요한 현금 흐름을 가늠하기 어려운 환경이 고착화되고 있다.
업계가 이번 개편안을 2012년 일괄 약가 인하의 재현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정책보고서에 수록된 약가인하정책 영향 분석에 따르면, 당시 대폭적인 급여 의약품 약가 인하로 건강보험 재정 지출은 단기적으로 줄었지만, 이후 제약기업들의 제품 포트폴리오가 비급여와 수입 코프로모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소비자 약제비 부담은 13.8퍼센트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보고서는 제약사들이 약가 인하 대상에서 벗어난 비급여 의약품 생산 비중을 늘리고, 자체 생산품 대신 다국적사 제품의 코프로모션 비율을 확대한 점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국내 생산 기반이 약해질수록 공급망 안정성이 떨어지고, 환자와 건강보험 재정 모두 장기적으로 더 큰 비용을 부담하게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단기 재정 절감에 초점을 맞춘 약가 조정이 구조적인 산업 약화를 초래해 결국 환자와 사회 전체 비용을 키운 셈이다.
이번 개편안과 연계해 논의되는 시장연동형 실거래가제 재도입 이슈도 현장의 긴장을 높인다. 실거래가제는 요양기관이 실제 구매한 가격을 기준으로 약가를 다시 조정하는 방식으로, 제도 취지는 투명한 거래와 재정 효율화에 있다. 다만 병·의원의 구매 단가 인하 압력이 커지면서 초저가 입찰과 과도한 할인 경쟁이 벌어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CSO로 불리는 판촉 대행 조직 의존이 커져 우회 리베이트 등 불투명 영업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미 CSO 대행사 수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검증과 규제 장치는 미비하다고 지적한다. 약가를 추가로 낮추더라도 유통 구조가 왜곡되면 환자 부담 경감과 건보 재정 절감이라는 정책 목표에 도달하기 어렵고, 대신 영업 관행만 복잡하고 불투명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바이오 의약품과 첨단 치료제처럼 생산비용과 품질 관리 부담이 큰 품목은 과도한 가격 압박이 곧 공급 불안과 품질 리스크로 연결될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정책 결정 과정의 구조적 한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제약업계는 이번 약가 개편안 발표 전 정부에 여러 차례 현장 의견을 전달했지만, 산업계와의 정식 협의나 합의를 전제로 한 거버넌스 구조가 부재했다고 본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은 건정심으로 불리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가 약가 정책을 의결하는 핵심 기구지만, 제약기업이 의견을 제도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개편안 논의 초기 단계에서 제네릭 상한을 40퍼센트대로 내리는 구체적인 수치 조정 방안은 공유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외 사례와의 비교도 제도 설계 논쟁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정 원장은 영국의 의약품가격 규제계획 PPRS를 대안적 모델로 꼽는다. 영국은 개별 품목 약가를 직접 깎기보다는 제약사가 국민보건서비스 NHS를 통해 올릴 수 있는 전체 이익 규모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가격을 간접 조정한다. 여기에 더해 영국 보건부와 제약산업협회 ABPI가 5년 주기로 협상해 제도를 개정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어, 산업계가 중장기 R&D 투자 계획을 세우는 데 필요한 예측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 제안이 나오고 있다. 안정훈 이화여대 융합보건학과 교수는 KPBMA 정책보고서에서 사용량 약가 연동제와 실거래가 약가인하의 시행 시점을 통합해 중복 인하 리스크를 줄이고, R존으로 불리는 합리적 조정 범위를 도입할 것을 제시했다. R존은 의약품 실거래가와 고시 약가 간 괴리가 일정 수준 이내일 경우 약가 인하를 면제하거나 유예하는 방식으로, 과도한 인하 조정을 막아 저가 공급 유인을 유지하고 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장치다.
또 매출 규모별 R&D 투자 기준을 마련해 혁신형 기업 인증 여부와 무관하게 R&D 비율이 일정 수준 이상인 기업에는 약가 인하율을 차등 감면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제네릭 수익으로 신약 개발을 뒷받침해 온 국내 산업 구조를 감안하면, 투자 성향에 따른 차등 인센티브를 통해 약가 규제와 혁신 유인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시도다. 고위험 혁신 신약에 선제적으로 투자하는 기업일수록 약가 인하의 충격을 덜 받도록 설계하면, 약가 정책이 R&D 위축이 아닌 고도화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전문가들은 약가 사후관리 정책과 R&D 지원정책 간 충돌을 최소화하는 거버넌스 개편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건정심과 별도의 상설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제약·바이오 기업, 병원, 환자 단체, 학계가 함께 재정과 산업, 환자 접근성 균형을 논의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온다. AI 기반 신약개발, 희귀질환 타깃 유전자 치료제, 디지털 치료제 등 미래 기술이 본격 상용화되는 국면에서 약가와 가치 평가 체계가 뒤따르지 못하면 국내 기술이 해외에 비해 과소 평가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안 교수는 약가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관리체계 혁신이 신약 개발 투자 결정의 투명성과 안정성을 높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합리적인 경제성 평가 체계를 통해 국내 신약의 임상적 가치와 가격을 정교하게 연동하고, 그 결과를 글로벌 시장에 제시할 수 있어야 기술력과 산업 경쟁력이 동시에 인정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산업계와 정부가 이해관계만 앞세운 줄다리기에서 벗어나, 데이터 기반 평가와 장기 재정 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는 분위기다.
제약업계와 정부 모두 약가 제도가 건강보험 재정, 환자 부담,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남은 과제는 단기 재정 절감과 장기 혁신 투자를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산업계는 이번 제네릭 약가 인하가 실제 시장에 어떤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지, 그리고 그 충격을 흡수할 제도적 완충 장치가 마련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기술과 정책, 산업과 재정이 맞물리는 한국형 약가 시스템이 어떤 방향으로 재정립될지에 따라 K바이오의 다음 10년이 갈릴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