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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후보물질부터 임상까지"…제약바이오, 개발속도전 본격화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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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제약바이오 산업의 연구개발부터 제조, 품질관리, 규제 대응까지 전 주기를 재편하는 기술로 부상하면서 글로벌과 국내를 막론하고 활용 범위가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AI는 신약 후보물질을 찾아내고 임상을 설계하는 것은 물론,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고 시판 후 이상사례를 모니터링하는 단계까지 침투해 기존보다 짧은 시간과 적은 비용으로 신약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도구로 주목받는다. 업계에서는 이번 AI 확산 흐름을 향후 글로벌 신약 패권을 가를 ‘디지털 전환 경쟁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31일 한국바이오의약품협회가 공개한 제약바이오 산업 AI 활용 현황 리포트에 따르면 AI는 표적 발굴, 후보물질 설계, 전임상과 임상, 허가 심사 대응, 시판 후 감시 등 의약품 생애주기 전 단계에서 활용 가능한 범용 기술로 평가된다. 리포트는 AI가 각 단계별로 성공률을 높이고 시행착오를 줄여, 개발 기간과 비용을 동시에 줄이는 방향으로 산업 구조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제약사는 이미 AI를 신약 후보물질 발굴과 임상 설계의 핵심 도구로 삼고 있다. 로슈, 화이자, 다케다 등 주요 업체는 데이터 과학 조직을 중심으로 AI 기반 디지털 R&D 플랫폼을 신설해 화합물 탐색과 임상 전략 수립을 통합 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이런 플랫폼은 단백질 구조 예측, 약물 후보의 합성 가능성 평가, 약물 반응 시뮬레이션 같은 기능을 결합해 후보물질의 성공 가능성을 데이터 기반으로 선별하는 구조다.

 

미국 인실리코 메디슨은 자체 AI 플랫폼을 통해 질병 표적 발굴부터 임상 1상 종료까지 약 30개월 안에 진행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동일 과정에 수년이 걸리던 것과 비교하면 개발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셈이다. 인실리코는 단백질 타깃을 정하는 단계에서 질병 관련 데이터와 유전체 정보를 통합 분석하고, 분자 구조를 설계하는 단계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해 최적 후보군을 자동 설계한다.

 

영국계 글로벌 제약사 GSK는 빅데이터 인포메이션 플랫폼을 구축해 임상시험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는 시간을 대폭 단축했다. 과거에는 방대한 임상 데이터에서 통계 분석과 검증 작업을 거치는 데 1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지만, 현재는 AI 기반 분석으로 30분 내 주요 인사이트를 도출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데이터 처리와 가설 검증을 반복하는 과정을 자동화한 결과다.

 

미국 바이오 벤처 제너레이트 바이오메디슨은 AI 기반으로 발굴한 신약 후보를 미국 식품의약국 패스트트랙 적용을 받아 업계 최초 수준의 AI 기반 신약 임상 3상에 진입했다. 이 회사는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 3상 진입까지 통상 8년에서 10년 정도 걸리던 일정을 약 4년으로 줄였다. 추가적으로 미국 길리어드 사이언스는 임상시험 솔루션 기업인 메디데이터의 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도입해 임상 디자인 최적화와 환자 모집 효율화를 추진하며, 전체 임상 기간의 30~40퍼센트인 6년에서 7년 사이를 줄이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도 AI 기반 플랫폼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며 기술 내재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연구개발 영역에서는 신약 후보물질 발굴과 최적 설계를 위한 AI 도입이 확산되고, 생산 라인에서는 스마트 품질관리와 디지털 제조 시스템 구축이 진행되는 양상이다.

 

JW중외제약은 유전체 및 화합물 데이터베이스와 자체 AI 모델을 통합한 JWave 플랫폼을 구축했다. 이 플랫폼은 표적 질환에 맞는 후보물질을 자동 탐색하고, 구조 최적화 과정에서 부작용 가능성과 약효를 동시에 예측하는 기능을 갖춘 것으로 전해진다. 회사 측은 기존 데이터 분석 기반 플랫폼에 비해 연구 소요 시간이 25퍼센트에서 최대 50퍼센트까지 단축되고, 실험 반복에 따른 비용 절감도 함께 기대하고 있다.

 

표적 발굴 분야에서는 스탠다임이 질병과 연관된 단백질 타깃 후보를 도출하는 데 AI를 활용하고 있다. 이 회사는 문헌 데이터와 임상 데이터, 오믹스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 질병 네트워크를 모델링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타깃 후보를 제시하는 접근법을 사용한다. 후보물질 설계 구간에서는 갤럭스가 드노보 항체 설계를 위해 AI를 도입했다. 드노보 설계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분자 구조를 처음부터 설계하는 기법으로, AI가 고속으로 항체 서열을 생성하고 안정성 및 결합력 예측을 수행해 유망 후보를 추리는 방식이 활용된다.

 

전임상과 임상 단계에서도 AI 도입이 늘고 있다. 국내에서는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K AI 신약개발 전임상 임상 모델 개발 사업에 여러 기업과 연구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이 사업에서는 전임상과 임상 데이터를 통합해 학습시키는 파운데이션 모델을 구축해, 동물실험 결과로부터 사람에서의 약동학과 약력학 반응을 더 정확히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성공 시 후보물질 중도 탈락을 줄이고, 임상 설계를 보다 정밀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제조 영역에서는 SK바이오사이언스가 AI 기반 데이터 분석과 예측 모델링을 활용해 백신 생산 공정 설계를 최적화하고 있다. 백신 제조는 배양 조건과 정제 단계에 따라 품질 편차가 크기 때문에, AI로 온도와 pH, 영양분 농도 등 여러 변수를 동시에 최적화하는 방식이 중요해지는 추세다. 공정 조건과 품질 결과 간 상관관계를 모델링함으로써, 실패 배치를 줄이고 생산 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핵심 목표다.

 

품질관리와 시판 후 안전성 모니터링에서도 AI 활용이 시작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자동화 시각검사 시스템 도입을 예고하며, 생산된 바이알과 주사제의 외관 결함을 AI 비전으로 판독해 사람이 수행하던 검사 업무를 대체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검사의 일관성과 속도를 높이고, 대량 생산 시 발생할 수 있는 휴먼에러를 줄이는 효과가 기대된다. 시판 후 안전성 측면에서는 이상사례 보고 데이터를 자동 분석해 신호를 조기에 포착하는 시스템에 대한 수요도 커지고 있다.

 

한국바이오의약품협회는 AI 활용 우선순위가 실패 가능성 제거에 따른 투자 대비 수익률에 따라 결정된다고 분석했다. 협회는 연구 단계가 1순위로, 초기 후보 검증 과정에서 AI를 활용하면 불합격 가능성이 큰 후보를 빠르게 걸러낼 수 있어 시간과 비용을 즉시 절감하는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임상 단계가 2순위로 꼽혔다. 임상기간과 비용은 AI로 크게 줄일 수 있지만, 희귀질환과 대조군 부족 같은 구조적 문제로 실패 확률을 완전히 낮추기 어려워 효과에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품질 분야는 3순위로, AI가 공정 모니터링과 품질 편차 감소 등 운영 효율 개선에는 기여하지만 연구나 임상 단계만큼 직접적인 개발 성공률 개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이미 AI를 둘러싼 신약개발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AI 신약개발 기업이 다수 상장에 성공했고, 빅파마와의 공동개발 계약도 늘어나는 추세다. 국내 기업들은 아직 플랫폼 고도화와 데이터 확보 단계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정부 과제와 병원 데이터 연계를 통해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가 집중되고 있다. 다만 각국 규제당국이 AI가 도출한 결과를 어떻게 검증하고 허가 심사에 반영할지에 대한 세부 가이드라인은 발전 중이라, 실제 상용화까지는 제도 정비 속도도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AI가 제약바이오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잠재력이 있지만, 데이터 품질과 임상 검증, 윤리적 고려를 충족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환자 데이터와 유전체 정보가 결합되는 영역에서는 개인정보 보호와 알고리즘 투명성 요구도 높아지고 있어, 기술 개발과 규제 간 균형이 필수라는 의견이 나온다. 산업계는 AI 기반 신약개발 모델이 실제 시장 승인과 매출로 이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어느 기업이 데이터와 플랫폼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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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바이오#ai신약개발#한국바이오의약품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