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증원 땐 사실심 약화·사법 정치화 우려도"…법원·학계, 여야 사법개혁안 놓고 격돌
대법관 증원을 둘러싼 갈등이 사법부 안팎에서 정면 충돌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사법개혁안의 핵심으로 제시한 대법관 증원론을 두고 대법원이 연 공청회에서 법관, 변호사, 학계가 팽팽히 맞서며 사법제도 개편 논쟁이 한층 가열되는 분위기다.
대법원 소속 법원행정처는 9일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청심홀에서 법률신문과 함께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 방향과 과제 이틀째 공청회를 열고 대법관 증원과 상고제도 개편을 주제로 논의를 진행했다. 더불어민주당 안에는 대법관을 12명 늘리는 방안이 담겨 있으며, 상고심 과부하 해소와 재판받을 권리 강화가 명분으로 제시돼 있다.

첫 발제를 맡은 김도형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부장판사는 대법원의 핵심 기능을 법령의 통일적 해석과 법적 가치 기준 제시라고 규정하며 급격한 대법관 증원에 강한 우려를 드러냈다. 김 부장판사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두 차례 지낸 경력을 언급하며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심층 논의가 선례 변경과 새로운 해석 제시에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법관이 갑자기 2배로 늘 경우 상호 간 토론과 설득의 밀도가 낮아져 충분한 심리와 숙의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또 연합부 2개를 구성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 대법원 판결이 소부, 연합부, 전원합의체 판결로 나뉠 경우 각 판결의 효력에 대한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이어 대법관 수 증원이 1심과 2심을 담당하는 경력 법관 감소로 이어져 사실심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부장판사는 1심과 2심 기능이 약화되면 사실심 판결에 대한 국민 불신이 커지고 상고가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 발생해 소송비용 증가와 사건처리 기간 장기화 등의 부정적 결과가 뒤따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안대로 대법관을 12명 늘릴 경우 현재 101명인 법관 재판연구관을 최소 24명, 최대 101명까지 추가 확보해야 한다고 추산했다.
이어 토론에 나선 박현수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이자 전국법관대표회의 재판제도분과위원회 위원도 비슷한 우려를 공유했다. 박 부장판사는 입법안대로 12명의 대법관을 짧은 기간 안에 임명하면 대법원 비대화와 사실심 약화가 함께 나타나 상고 사건 증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그는 대법관 증원을 완전히 배제하기보다 소수 인원을 순차적으로 늘려야 한다며 증원 속도와 규모 조절을 주문했다.
정치적 파장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재묵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특정 정권 시기와 맞물린 최고법원 조직의 급격한 증원이 다수 반대 정파에 코트패킹 의심을 키워 사법 독립성과 제도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구성 개편이 정치적 시기와 정파적 이해에서 벗어난 투명한 절차를 전제로 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사법의 정치화가 심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면 변호사단체와 일부 법조계 인사는 대법관 증원이 상고심 과부하 해소와 국민 권리구제 확대를 위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맞섰다. 발표자로 나선 여연심 변호사 법무법인 지향·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법센터 법원개혁소위원장은 대법관 1인당 사건 부담을 줄이면 사건당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역량이 늘어나 상고심 심리가 더 충실하고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고심 과부하 상태에서 벗어나 대법관들이 최소한의 검토 시간을 확보해야 재판받을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된다고 강조했다.
여 변호사는 법리를 심층적으로 숙고하고 발전시키는 기능 강화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법관 수가 적을수록 특정 직역 출신으로 대법원이 채워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증원을 통해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인사가 임용될 여지가 넓어진다고 했다. 다만 그는 코트패킹 논란을 의식한 듯 증원 속도를 적절히 조절하고 제도 변화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검증·점검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이보연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위원회 위원도 대법관 증원을 지지했다. 이 변호사는 전원합의체 구성이 어렵다는 이유로 대법관 증원을 막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시스템을 적절히 설계하면 전원합의체와 같은 효과를 유지하면서도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통해 재판 결과에 더 다양한 입장을 반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법관을 26인까지 늘린다면 대법관 1인당 처리사건 수가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 국민 권리구제가 그만큼 신속하고 충실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청회에서는 상고제도 자체를 손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상고제도 개편 방안을 주제로 발표한 오용규 변호사 법무법인 동인·부장판사 출신은 1심 재판의 충실을 전제로 미국과 영국처럼 상고를 제한하는 방안이 향후 사법개혁 논의에 참고가 될 수 있다고 제시했다. 중국정법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오 변호사는 서울고등법원 기획법관과 사법연수원 교수 등을 지냈으며,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주요국 상고제도와 법관 운용 실태를 비교·분석한 연구서를 최근 출간한 바 있다.
그는 미국의 경우 상고심이 철저한 법률심으로서 중요한 연방 문제나 판례 통일이 필요한 사안에서만 재량으로 상고를 허가한다고 설명했다. 영국도 원칙적으로 모든 상소 단계에서 허가가 필요해 불필요한 상소를 엄격히 제한한다는 점을 소개했다. 다만 그는 상고제도 개혁의 핵심 전제를 사실심, 특히 1심 강화로 제시했다. 1심 재판이 충실해야 상소 제한의 명분이 생긴다며 미국식 배심제와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하나의 방안으로 제언했다.
사법개혁 추진 방식에 대한 경고도 이어졌다. 이재묵 교수는 개혁이 국회나 사법부 어느 한 기관의 일방적 결정으로 진행될 경우 사법개혁이 정파적 논쟁에 휘말리고 제도 변화의 정당성도 약화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고제도 개편은 단기·졸속 논의가 아니라 중장기 관점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공개적 논의 구조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관 증원과 상고제도 개편을 둘러싼 논쟁은 향후 국회 입법 과정에서 여야 정면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국회는 더불어민주당 사법개혁안과 사법부·법조계의 의견을 놓고 추가 공청회와 전문가 의견 수렴 절차를 이어가며 상고심 구조 개편과 대법관 증원 여부를 본격 검토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