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은은 악마의 금속이 아니다”…국제 은값 71% 급등, 공급난·첨단산업 겹치며 사상 최고가

최하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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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각 기준 11월 중순, 국제 은 시장에서 트로이온스(약 31.1g)당 은 현물 가격이 57달러 선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 수준에 근접한 급등세를 연출했다. 중·남미 광산 생산 차질로 인한 공급난과 인도 및 첨단 산업의 수요 확대가 맞물리면서 은값은 연초 대비 70% 이상 뛰어오르며 금을 크게 앞지른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번 가격 급등은 안전자산 선호와 에너지·디지털 전환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타난 이례적 현상으로, 국제 상품 시장 전반에 적지 않은 파장을 낳고 있다.

 

현지시각 기준 10월 중순,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미국(USA) 경제 매체 CNBC는 은값이 금과 함께 안전자산으로 재부각되며 가파른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 은 현물 가격은 지난달 중순 온스당 54.47달러까지 치솟아 연초 대비 71% 상승한 것으로 집계됐고, 이후 한 차례 조정을 거친 뒤 다시 상승세를 탔다. 한국시간 12월 1일 오전 10시 20분 기준 은 현물가는 온스당 56.2∼57.6달러 구간에서 거래되며 최고가 수준을 경신하고 있다.

국제 은 가격 71% 급등…온스당 57달러 돌파하며 사상 최고가
국제 은 가격 71% 급등…온스당 57달러 돌파하며 사상 최고가

은 가격이 현재와 같은 고점 구간에 진입한 것은 최근 50년을 통틀어 세 차례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이례적인 국면으로 평가된다. 앞선 두 차례는 1980년 1월 미국 석유 재벌 헌트 형제가 세계 은 공급량의 3분의 1을 매집해 시장을 장악하려 했던 시기와, 2011년 미국 부채한도 협상 위기 속에서 금·은이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집중 매수됐던 시기다. 현재의 고가 행진은 투기적 요인뿐 아니라 구조적 수급 변화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시장 조사업체 블룸버그에 따르면 은 시장은 규모가 금의 약 10분의 1에 불과해 유동성이 상대적으로 얕고, 가격 변동 폭이 큰 탓에 ‘악마의 금속’이라는 별칭을 얻어왔다. 수급 불균형이나 투자 심리 변화가 발생하면 가격이 급격히 요동치기 쉬운 구조다. 이번 상승세 역시 공급 감소와 수요 확대가 동시에 전개되면서 가격 탄력이 과거보다 크게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공급 측면에서는 최근 10년간 중·남미 지역을 중심으로 은 광산 생산량이 감소하며 만성적인 공급 부족이 누적돼왔다. 글로벌 주요 산지에서의 생산 차질은 현물 시장의 실물 수급을 압박했고, 이 같은 물량 부족이 가격 상승 압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규 광산 개발과 증산이 단기간에 이뤄지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도 공급난 우려를 키우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수요 측면에서는 세계 최대 은 소비국인 인도가 가격 상승을 이끄는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지난달 중순 기준 인도 내 은 가격은 국제 공급난과 내수 수요 급증이 겹치며 연초 대비 85%나 급등해 글로벌 평균을 크게 웃돌고 있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보석과 장신구, 식기류 등에 은이 널리 사용돼 왔고, 실물 투자 자산으로서 은을 선호하는 문화도 강하다. 인도는 매년 약 4천t의 은을 소비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약 80%를 영국(UK), 아랍에미리트(UAE), 중국(China) 등에서 수입해 국제 시장 수급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첨단 제조업에서의 산업용 수요 확대 역시 은값 상승을 견인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은은 전기 및 열 전도성이 뛰어나 전기차, 인공지능(AI) 관련 고성능 컴퓨터 부품, 이차전지, 태양광 패널 등 다양한 첨단 산업 분야에서 핵심 소재로 활용된다. 업계 추정에 따르면 전기차 1대당 은 사용량은 약 25∼50g 수준으로, 전기차 보급 확대는 곧바로 은 소비 증가로 이어지는 구조다. 태양광 발전 설비 증설과 데이터센터 인프라 확대도 은 수요를 자극하고 있다.

 

미국 금융투자사 인베스코(Invesco)에서 원자재 상품을 총괄하는 폴 심스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은 출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컨테이너선이 아닌 비행기를 이용해 운송해야 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바닷길 운송보다 훨씬 높은 비용이 드는 항공 운송이 선택되고 있는 점을 들어, 현 시점의 공급 부족과 물류 긴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심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은은 비교적 높은 가격대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며, 당분간 가격이 추가로 오를 여지가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은이 귀금속과 산업용 금속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안전자산 수요와 산업용 수요가 겹치는 구조상 단기간에 고가 기조가 꺾이기 어렵다는 시각을 내놨다. 특히 “은은 배터리와 태양광 등에서 이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화석 연료 중심에서 전기 에너지 중심으로 기술과 산업 구조가 전환되면서 그 가치가 더 부각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은값 급등이 인플레이션 헤지 자산을 찾는 투자 수요와 맞물려 당분간 높은 변동성을 동반한 강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글로벌 중앙은행들의 통화 정책 경로,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전기차·재생에너지 산업 성장 속도 등이 은 가격 흐름을 좌우할 주요 변수로 지목된다. 금과 달리 산업 수요 비중이 높은 은의 특성상 경기 둔화 국면에서는 조정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유럽(EU)과 미국 주요 투자은행들은 최근 보고서에서 은을 재생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인프라 확대의 수혜 자산으로 언급하면서도, 시장 규모가 작은 만큼 소규모 자금 유입에도 가격이 크게 출렁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일부에서는 1980년과 2011년과 비슷한 급등 이후 급락 패턴이 재현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단기 투기성 매수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중·남미 광산의 생산 감소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고, 인도를 비롯한 신흥국의 실물 수요와 전기차·AI 산업의 성장세가 이어질 경우 은 가격이 고점 부근에서 등락을 반복하며 강세 흐름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다만 ‘악마의 금속’이라는 별칭이 상징하듯 은 시장은 과거에도 급등과 급락이 반복돼 온 만큼, 투자와 정책 결정 과정에서 높은 가격 변동성을 감안한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국제사회는 이번 은값 급등이 에너지 전환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어떤 구조적 변화를 예고하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하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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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은가격#인도#전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