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몇 명이 적정선인가"…법조계, 상고심 개편·하급심 강화 놓고 격돌
사법부 권한 구조와 국민 권리구제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여당이 추진하는 사법개혁 논의가 본격화된 가운데, 대법관 증원과 상고심 제도 개편을 두고 법조계 핵심 인사들이 정면으로 맞섰다. 재판소원 도입 여부를 둘러싼 쟁점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법원 소속 법원행정처는 11일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청심홀에서 법률신문과 함께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 방향과 과제라는 제목의 3일차 공청회를 열었다. 여당 주도의 사법개혁 입법 논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대법원 차원의 공식 공론장이라는 점에서 정치권과 법조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공청회 마지막 순서로 진행된 100분 토론에는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소장 권한대행), 김선수 전 대법관, 조재연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 박은정 전 국민권익위원장(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차병직 변호사(법무법인 클라스 한결, 법률신문 편집인)가 참석해 대법관 증원과 재판소원 도입, 하급심 강화 방안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헌법재판관을 지낸 문형배 전 대행은 상고심사제 도입을 전제로 한 단계적 증원안을 제시했다. 그는 "상고심사제와 변호사 강제주의 도입을 전제로 총 8명을 단계적으로 증원할 것을 건의한다"고 밝혔다. 개정안 시행 1년 뒤 대법관 4명을 먼저 늘리고, 시행 3년 뒤 4명을 추가해 대법관을 8명 증원한 뒤, 소부를 현행 3개에서 4개로 전환하고 연합부 2개와 상고심사부 1개를 두는 구상이다.
문 전 대행은 상고심사부가 상고 이유가 없는 사건을 상고 불수리 결정으로 걸러내면 본안에 회부되는 사건 수가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이를 통해 대법원의 법률심 기능을 강화하고, 심리불속행 기각에 대한 국민 불신을 완화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3년 뒤면 총선을 한번 거친다"며 "총선을 통해 야당도 사법부 구성에 관여할 기회를 주는 게 제도의 수용을 위해 바람직하다"고도 말했다.
반면 김선수 전 대법관은 더불어민주당 사법개혁 태스크포스가 제시한 대법관 12명 증원안을 지지했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 사법개혁 작업을 이끌었던 대표적 진보 성향 법조인으로, 과거에는 하급심 강화 우선론을 강조한 바 있다. 김 전 대법관은 지난 6월 법률신문 기고에서 "하급심 강화라는 법원의 근본적 개혁 방향과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며 증원안에 우려를 표했지만, 이날 토론에서는 입장을 조정해 증원 필요성에 힘을 실었다.
김 전 대법관은 "대법관 입장에선 주심 사건 수가 절반으로 감소하므로 지금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심도 있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며 "13명으로 구성되는 연합부에서도 현재 전원합의체보다 적극적으로 판례 변경 등을 통해 법령 해석의 통일을 기하는 기능도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증원 시기와 관련해서도 향후 3년에 걸쳐 매년 4명씩 늘리는 민주당 안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장기간의 과도기가 지속될 경우 사법부 운영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권 임기 내 임명되는 대법관 수를 두고 야권이 정치적 편향을 우려하는 데 대해서도 김 전 대법관은 선을 그었다. 그는 "대통령이 평균 21.6명을 임명하게 돼 평균적인 수치"라며 특정 정권에서 22명의 대법관이 임명되는 구조가 과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대법관 증원과 하급심 강화는 배치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공청회에 참석한 나머지 패널들은 대법관 수 확대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사법시험 22회 수석 합격 후 판사로 근무하다 변호사로 활동한 조재연 전 대법관은 대법원 사건 필터링의 필요성을 우선 제기했다. 그는 "심리불속행이든 상고 심사든 일정 방식으로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을 거르지 않으면 대법원의 기능이 작동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 전 대법관은 과거 상고허가제가 국민적 반발 속에 좌초된 점을 상기시키며, 현재 소송법 체계 안에서 상고이유서만으로 상고 사유 해당 여부를 본안 전 단계에서 심사하고,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상고기각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제안했다. 그는 "단기간 내 많은 대법관을 증원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는 건 대부분 전문가의 일치된 의견"이라며 "대법관 증원을 한다면 4명, 1개 소부 정도 하면서 효과를 검토하고 단계적으로 논의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시민사회 활동을 병행해온 박은정 전 국민권익위원장도 하급심 신뢰 회복을 근본 과제로 꼽았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교수를 거쳐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이력이 있다. 박 전 위원장은 "주요국들이 상고 제한 제도를 두는데 왜 유독 우리나라에선 국민적 이해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가"라며 "그 이유는 결국 하급심에 대한 신뢰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박 전 위원장은 대법관 증원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속도 조절을 주문했다. 그는 "대법관 수를 늘린다면 점진적으로 소부 1개에 해당하는, 상고심사부를 담당할 수 있는 정도로 우선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동시에 하급심 판사 충원과 재판 환경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병직 변호사는 대법관 증원이 국민 권리구제 효과를 크게 높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상고심 사건 1건에 주어지는 시간이 55초인데 대법관 수를 2배로 늘리면 1분 50초로 늘어난다"며 "그러면 실질적인 합의나 심리가 가능해지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대법관 증원을 아무리 한다 해도 국민의 권리구제 측면에서 그다지 실효성이 없다"며 상고제도와 대법관 수 논쟁이 과연 본질적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토론에서는 법원 재판을 대상으로 한 헌법소원, 이른바 재판소원 제도 도입 논의도 다뤄졌다. 여당 일각에서 재판소원을 통해 국민의 권리구제 통로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상황이어서, 헌법재판소 역할과 맞물려 향후 정치권 논쟁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문형배 전 대행은 재판소원 도입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재판소원을 시행하는 독일에서 인용률이 1% 안팎"이라며 "독일의 헌법과 대한민국 헌법은 다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헌법재판소를 유일한 최고법원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재판소원 도입이 곧바로 권리구제 확대를 의미하지 않으며, 우리 헌법 체계와도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문 전 대행은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키울 것이냐 대법원의 권한을 키울 것이냐 같은 기관 이기주의 관점이 아니라 국민의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제도 설계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기 과제로서 재판소원 도입 논의를 이어가되, 단기적으로는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 결정에 대해 법원 재심 사유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헌법재판소법을 개정하자고 제안했다.
조재연 전 대법관도 재판소원 도입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법원의 재판을 헌법소원 대상에서 제외한 현행 체계가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정치권과 사회가 합의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며 "법률 개정 하나로 그걸 바꾸는 게 형식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헌법재판소는 개별적 구제 절차를 다 거친 다음에 가기 때문에 원하든 그렇지 않든 대법원 확정 판결을 거쳐야 한다"며 "그렇다면 상고심 증가, 대법원에서 만족을 못 하고 헌법재판소로 가면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이 겪고 있는 비슷한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차병직 변호사 역시 재판소원 도입 시 헌법재판소 사건 폭증을 우려했다. 그는 "상고심이 법률심이라지만 사실상 모든 사건을 법률심화해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게 사실상 법률가들의 비상한 기술"이라며, 헌법적 쟁점에 한해 헌법소원을 허용하더라도 "모든 법률가는 모든 사건을 헌법 쟁점화할 수 있고,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토론에서 법조계 패널들은 대법관 증원 규모와 속도, 상고심사제 도입, 하급심 강화, 재판소원 도입 여부를 놓고 입장을 달리했지만,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모두 사건 폭증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데에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여당이 추진하는 사법개혁 법안 심의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회는 대법원의 공청회 결과와 법조계 내부 논쟁을 참고해 상고심 구조 개편과 헌법재판 절차 조정 방향을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