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고궁을 걷는다”…종로의 고즈넉한 시간 여행이 위로가 됐다
요즘 겨울이 깊어질수록 종로를 천천히 걷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유독 봄과 가을에만 찾던 고궁이었지만, 지금은 차가운 공기 속 고요를 즐기려는 이들의 계절 산책 코스로 자리 잡았다. 사소한 나들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잠시 숨 고르기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서울 종로구의 겨울 풍경은 고궁에서부터 시작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경복궁은 눈이 내린 날이면 더욱 깊은 색을 띤다. 광화문을 지나 근정전 앞 너른 마당에 서면, 발자국 소리만 또렷하게 울린다. 경회루를 감싼 연못과 소나무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이면, 사람들은 무심코 걸음을 늦추고 오래된 시간의 흐름을 떠올린다. 한 여행자는 “사진을 찍으려 왔다가, 결국 한참을 그냥 서 있기만 했다”고 털어놓았다. 궁궐 안을 가로지르는 산책로는 그만큼 조용한 사색을 품은 길이 된다.

창덕궁 옆으로 이어지는 창경궁은 한층 아늑한 겨울을 품고 있다. 세 분의 대비를 위해 지어졌던 만큼 규모는 경복궁보다 작지만, 그만큼 정갈하고 차분하다. 명정전과 홍화문 일대에는 사람이 붐비지 않아, 숨을 크게 들이켜도 주변이 어색하지 않다. 고궁의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앙상한 겨울 나무와 붉게 남은 단청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종로 일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주말 아침, 창경궁 한 바퀴가 일주일 치 피로를 식혀준다”는 말이 공감 어린 고백처럼 공유된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도심 한복판이지만 자연과 역사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어난 것이다. 세대 구분도 뚜렷하지 않다. 교복 차림의 학생부터 카메라를 들고 걷는 중년, 손을 잡고 걷는 노년 부부까지, 겨울 궁궐의 한 장면 속에는 다양한 시간이 겹쳐 있다. 사람들은 추억을 떠올리면서도 동시에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고궁을 나서 서촌 골목으로 접어들면, 분위기는 또 달라진다. 통의동에 자리한 대림미술관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공간이다. 겉으로 보기엔 아담한 건물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여러 색과 빛, 설치 작업들이 낯선 생각을 건넨다. 전시실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관람객들은 “사진을 찍고 싶어서 왔는데, 오히려 휴대전화를 내려놓게 됐다”는 말을 자주 남긴다. 서촌 특유의 낮은 건물, 좁은 골목과 어우러진 미술관의 풍경은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는 역할을 한다.
종로의 겨울 동선은 부암동으로 이어진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흥선대원군의 별서였던 석파정을 품은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대 미술 작품을 감상한 뒤 마당으로 나서면, 오래된 한옥과 주변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흰 눈이 쌓인 정자와 소나무, 그 사이로 비치는 전시관 유리창 불빛은 전통과 현대가 어색하지 않게 뒤섞인 풍경을 만든다. 한 관람객은 “전시를 보고 난 뒤 석파정 마당에 서 있으니, 머릿속이 조용해졌다”고 표현했다. 도시 속에서 찾은 짧은 피난처에 가까운 감상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도심 속 정적 탐방’으로 부른다. 멀리 떠나지 않고도 익숙한 공간에서 새로운 감정을 발견하려는 욕구가 커졌다는 이야기다. 여행의 기준이 볼거리나 쇼핑에서 벗어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풍경과 순간으로 옮겨가고 있다. 한 도시문화 연구자는 “요즘 사람들은 화려한 이벤트보다, 걸으면서 생각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한다”며 “역사와 예술이 공존하는 종로의 동선이 그런 욕구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경복궁은 이제 사계절 내내 가는 곳이 됐다”, “예전엔 수학여행 코스였는데, 요즘은 제 발로 찾는 쉼터 같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누군가는 “부산에서 올라와 하루 종일 종로만 걷고 내려갔다”고 전했고, 또 다른 이는 “겨울 데이트 코스로 고궁과 미술관만큼 조용하고 알찬 조합이 없다”고 적었다. 계절과 목적은 달라도, 낡은 돌담과 흰 눈, 조용한 전시장을 기억하는 마음은 닮아 있다.
겨울 종로의 풍경은 여행이라 부르기엔 소박하고, 산책이라 하기엔 밀도가 깊다. 고궁의 설경, 서촌의 골목, 부암동의 미술관을 잇는 하루의 시간은 화려하진 않지만, 마음 한편을 천천히 덮어 준다. 작고 사소한 선택 같지만, 주말마다 찾는 이 길 위에서 우리의 삶의 방향은 조금씩 다른 쪽을 향해 걷고 있다. 지금 이 변화는,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나만의 조용한 겨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