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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약 난임치료 과학적 입증"…한의협, 장관 발언 정면 반박

조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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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약 난임치료의 과학적 근거를 둘러싼 논쟁이 보건의료계와 정책 현장으로 번지고 있다. 의사 출신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대통령 업무보고 자리에서 한의약 난임치료의 효과가 객관적으로 입증되기 어렵다는 취지로 언급하자, 한의사 단체가 복지부가 스스로 마련한 임상진료지침과의 모순을 지적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초저출산 대응을 위해 난임치료 수단을 다각화해야 한다는 요구와, 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지원 사업에는 보다 엄격한 과학적 검증이 필요하다는 원칙 사이의 간극이 부각되는 장면이다.

 

사태의 발단은 16일 세종청사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대통령 업무보고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한방 난임치료에 대한 국가지원 여부를 질의하자, 정은경 장관은 일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원 사례를 언급하면서도, 한의학 치료 효과에 대해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입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한의약 난임치료를 국가사업으로 확대하는 데에는 임상 근거 수준과 표준화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읽힌다.

대한한의사협회는 바로 다음날인 17일 성명서를 통해 “복지부 장관이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보건복지부의 공식 자료를 무시하고 개인 의견을 피력했다”고 비판했다. 3만 한의사 명의로 발표한 성명에서 한의협은 정 장관의 발언을 “한의약 난임치료와 이를 통해 난임을 극복해 온 난임부부를 폄훼한 망언”으로 규정하며, 한의치료로 임신에 성공한 부부와 한의계 전체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또 장관 발언이 한의약 난임치료를 둘러싼 사회적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한의협이 정면으로 제시한 반론의 핵심은 복지부가 이미 한의약 난임치료에 대해 일정 수준의 과학적 근거를 인정해 왔다는 점이다. 한의협은 보건복지부가 공표한 여성 난임의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을 근거로 들었다. 이 지침에서 난소예비력 저하 여성에 대한 한약 치료는 근거 수준 B Moderate로 평가돼, 충분한 임상 근거가 있는 중등도 이상의 치료법으로 분류된다. 한의협은 이 등급 체계가 첩약건강보험시범사업 대상 질환 선정 기준에 활용된 점을 강조하며, “복지부 스스로 국가사업에 활용 가능한 수준의 근거를 인정한 치료를 장관이 공개적으로 부정했다”고 반박한다.

 

보조생식술을 병행하는 난임 여성에 대한 한의 치료에 대해서도 한의협은 구체적인 근거 수준을 제시했다. 지침에 따르면 체외수정 등 보조생식술을 받은 여성의 경우 침 치료는 A High 등급, 전침과 뜸, 한약은 모두 B Moderate 등급으로 분류된다. A High는 다수의 질 높은 임상연구를 통해 효과가 입증된 수준을, B Moderate는 통계적 유의성이 확보된 무작위 대조시험이나 체계적 문헌고찰이 존재하는 중등도 근거 수준을 의미한다. 한의협은 이를 근거로 한의약 난임치료가 과학적 평가 체계 안에서 이미 검증을 받았으며, 난임 부부에게 실질적인 선택지로 제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장 적용 측면에서 한의협은 지자체 중심 한의약 난임 지원사업의 확산을 강조했다. 현재 전국 14개 광역자치단체와 72개 기초자치단체가 조례를 통해 한의약 난임 지원을 시행 중이다. 예컨대 경기도는 2017년 5억 원 규모로 시작한 한의 난임치료 지원 예산을 2024년 9억 7200만 원 수준으로 늘렸다. 지원 프로그램의 구체적 설계는 지자체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일정 기간 한약 처방과 침 치료 비용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런 흐름을 근거로 한의협은 “중앙정부의 직접 지원만 사실상 빠져 있을 뿐, 지역 수준에서는 이미 한의약 난임치료가 제도권 안에서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의협은 국가 난임 지원 정책의 구조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현재 중앙정부 차원의 재정 지원은 체외수정, 인공수정 등 서양의학 기반 보조생식술에 집중돼 있다. 한의협은 이를 “양방 시술에 편중된 정책”으로 규정하며, 한의약을 보완적 치료 옵션으로 편입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합계출산율 0.7명대라는 초저출산 상황에서 난임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의료 자원을 최대한 넓혀야 한다며, 특정 영역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책 효율성과 국민 체감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비판한다.

 

한의계는 정부와 공공 연구기관이 수행한 난임 관련 조사 결과도 근거로 제시했다. 보건복지부와 보건사회연구원이 2015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 지원으로 양방 체외수정을 받은 난임 여성의 88.4퍼센트, 인공수정을 받은 여성의 86.6퍼센트가 한의약 난임치료를 병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2012년 복지부 연구에서는 난임부부의 96.8퍼센트가 한의약 난임치료에 대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의협은 이런 수치를 들어 “난임 현장에서 이미 한의약이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환자 수요 역시 분명하다”고 해석한다.

 

법제도 차원에서의 근거도 언급됐다. 모자보건법은 난임치료를 위한 시술비 지원 시 한방 난임치료 비용을 포함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집행 단계에서는 한의약 난임치료에 대한 지원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한의협의 주장이다. 법률상 근거가 마련된 만큼, 복지부가 정책 설계로 이를 구체화하지 않는 것은 책임 회피에 가깝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특히 장관 발언이 중앙정부의 한의약 난임치료 지원 소극 행보를 더욱 고착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의협은 정부에 세 가지 정책 방향을 요구했다. 첫째, 중앙정부 주도의 한의약 난임치료 지원사업을 제도화해 지자체 의존 구조를 완화할 것. 둘째, 국공립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한의약 난임치료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효과와 안전성 데이터를 축적해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할 것. 셋째,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을 포함해 지자체별로 편차가 큰 난임 지원정책에 대해 국가 차원의 재정 지원을 확대해 접근성 격차를 줄일 것 등이다.

 

정책적 쟁점은 한의약 난임치료의 과학적 근거 수준을 어떻게 규정하고, 국가 재정 지원과 보험 급여로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에 맞춰지고 있다.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의 근거 등급은 복지부 주도의 과학적 검토 절차를 거친 결과지만, 여전히 무작위 대조시험 규모와 연구 설계의 엄격성, 재현성, 안전성 데이터가 국제 기준에 비춰 충분한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난임 치료 영역 자체가 고비용, 고위험 특성을 가진 만큼, 중앙정부의 직접 지원 확대에는 보다 엄격한 임상 근거와 경제성 평가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글로벌 차원에서도 난임 치료에서의 보완·대체의학 활용은 논쟁적 주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침 치료와 한약제 사용이 보조생식술과 병행되는 사례가 있으나, 다수 국가에서 공적 보험이나 국가 지원은 체외수정과 인공수정 등 서양의학 기반 표준 시술에 집중돼 있다. 일부 연구에서 보완의학이 난임 여성의 스트레스 감소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결과가 보고됐지만, 임신율 자체를 유의미하게 높이는지에 대해서는 연구 설계에 따른 차이가 크다는 평가도 많다. 결국 각국 정부는 안전성과 비용 효과성을 근거로 공적 재정 지원 범위를 설정하는 방향으로 가는 추세다.

 

초저출산이라는 구조적 위기 속에서 난임 치료 정책은 의료기술 논쟁을 넘어 인구·복지 전략과 직결된 영역이 됐다. 한의약 난임치료를 둘러싼 이번 논란은 한의학의 과학적 검증 수준, 서양의학과의 역할 분담, 공적 재정 투입의 기준 등을 다시 정교하게 짚어야 한다는 과제를 던진다. 한의계는 “정부가 더 이상 한의약을 왜곡하고 난임부부의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중앙정부 차원의 제도화를 촉구하고 있다. 산업계와 의료계, 정책당국이 과학적 근거와 환자 선택권, 재정 지속 가능성 사이의 균형점을 어디에 둘지에 따라 향후 난임 지원 체계의 방향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조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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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한의사협회#정은경#한의약난임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