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필수의약품 긴급도입 확대…식약처, 안정공급 전략 강화
희귀질환과 중증환자 치료에 필수적인 의약품 공급 전략이 내년부터 크게 바뀐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희귀필수의약품 긴급도입 범위를 넓히고, 국가필수의약품에 대한 주문생산과 품질관리 지원을 동시에 강화하면서 국내 의약품 공급망 구조에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환자가 해외에서 직접 구매하던 자가치료용 의약품 상당수가 공적 체계 안에서 관리되는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비용 부담 완화와 치료 시기 지연 문제 해소가 어느 정도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정부의 이번 조치가 희귀의약품 공급 경쟁뿐 아니라 고위험 감염병 백신 개발 속도에도 영향을 주는 정책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기획재정부가 공개한 2026년부터 이렇게 달라집니다 자료를 통해 내년부터 희귀필수의약품 긴급도입을 확대하고 국가필수의약품 안정공급을 강화하는 계획을 밝혔다. 긴급도입은 국내에서 허가를 받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만 허가·판매되는 의약품의 의료필수성과 해외 사용현황 등을 종합 검토해 식약처가 도입 여부를 결정하고,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가 직접 수입·유통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그동안에는 의료진 처방을 받은 환자가 해외에서 별도로 자가치료용 의약품을 구매하는 방식이 적지 않았는데, 식약처는 이 중 안정적 공급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품목을 단계적으로 긴급도입의약품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정부가 긴급도입 범위를 넓히는 배경에는 국내 허가 절차와 시장성 부족으로 상업적 진입이 어려운 품목들이 희귀질환 치료의 마지막 선택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현실이 깔려 있다. 환자가 개인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구매 비용이 높고 공급 교란에 취약해 치료 일정이 흔들리기 쉬웠다. 긴급도입 체계로 편입되면 국가 차원에서 수입 계약과 재고를 관리하게 돼 가격과 공급 측면에서 안정성이 높아지고, 국내 의료기관과 약국을 통한 접근성도 개선될 것으로 관측된다.
국가필수의약품 관리 체계도 한층 강화된다. 국가필수의약품은 보건의료상 반드시 필요하지만 시장성이 낮아 민간 기업이 자발적으로 안정 공급을 유지하기 어려운 품목을 정부가 지정해 공급을 지원하는 제도다. 정부는 이미 국가필수의약품 목록을 운영하면서 수요가 적거나 제조원가 대비 수익성이 낮은 품목에 대해 제약사의 생산을 지원하는 주문생산 방식의 사업을 진행해 왔다. 내년부터는 공급중단 이력이 있고 보건의료상 필수성이 높은 품목 중에서 신속하게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품목을 우선 대상으로 삼아 주문생산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주문생산 제도는 일종의 공공 조달 방식에 가깝다. 정부가 특정 필수의약품의 필요 물량을 제시하고 제조비용과 최소 이윤을 보전해 주는 형태로 계약을 맺으면, 제약사는 수익성 한계를 이유로 생산을 중단할 유인이 줄어든다. 특히 항생제, 해독제, 마취제, 수액제처럼 병원 현장에서 중단 없이 사용돼야 하는 품목에 대해 생산 기반이 유지되는 효과가 있다. 그동안 공급중단 이력이 있었던 품목은 병원 입장에서 대체약 탐색과 처방 변경에 따른 혼란이 반복되는 구조였는데, 정부가 이들을 우선 관리 품목으로 올리면서 필수의약품 재고 리스크를 줄이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감염병 대응 측면에서는 백신 등 바이오의약품의 품질시험과 분석 서비스가 확대된다. 식약처는 국내 백신 연구개발 기업을 대상으로 고위험병원체 관련 품질시험과 분석을 지원해 고위험 감염병 백신의 제품화를 가속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품질시험과 분석은 백신 후보물질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는 필수 단계로, 독립 공인기관의 시험 결과는 국내 허가 심사뿐 아니라 해외 진출을 위한 규제 당국 제출 자료로도 활용된다. 특히 내년 1월부터는 코로나19와 원숭이두창 등 고위험 감염병 백신에 대한 품질시험과 분석 서비스를 국내 개발사에 제공할 예정이어서, 중소 바이오기업들이 자체 인프라 구축에 투입해야 했던 시간과 비용을 줄일 여지가 생겼다.
고위험 감염병 백신 개발 과정에서 가장 큰 부담 중 하나는 BSL3 등급 이상의 고위험병원체를 다룰 수 있는 시험 시설과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문제다. 공공 시험기관의 분석 역량을 민간 연구개발에 개방하면 기술 검증 속도가 빨라지고 후보물질 탈락 여부를 초기 단계에서 걸러낼 수 있어, 전체 개발 기간과 비용을 줄이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글로벌에서는 선진 규제 당국과 공공 연구소가 백신 품질시험을 지원하며 산업 생태계를 떠받치는 구조가 일반적이어서, 이번 조치는 국내 규제 인프라를 이에 맞추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천연물을 원료로 하는 의약품에 대한 국가 차원의 품질관리 체계도 새로 구축된다. 식약처는 천연물의약품의 안전과 품질 관리를 전담하는 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을 출범시키고 내년 1월부터 운영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천연물의약품은 한약재, 식물성 성분 등 자연 유래 원료를 기반으로 한 의약품을 가리키는데, 원료 특성상 수확 시기와 산지, 가공 방식에 따라 성분 함량과 불순물 종류가 달라지기 쉬워 균일한 품질 관리가 핵심 과제로 꼽혀 왔다.
새 연구원은 원료 표준화, 유해 성분 분석, 제조공정 검증, 장기 안정성 평가 등 천연물의약품 전주기를 아우르는 안전성 평가를 담당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연구원이 구축하는 표준 분석법과 품질 기준이 제약사의 임상 전략과 허가 신청 자료 구성 방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천연물 기반 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공신력 있는 품질 데이터 확보는 수출 경쟁력과 직결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런 정책 묶음이 희귀필수의약품과 백신, 천연물의약품 등 상대적으로 시장성이 낮거나 규제 부담이 큰 영역에 공공 인프라를 집중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고 분석한다. 국내에서는 희귀질환 치료제와 필수의약품이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글로벌 제약사나 국내 기업이 공급을 줄이면서 공급 공백이 반복돼 왔다. 공공 주문생산과 긴급도입 확대는 이런 구조적 취약 부분을 정책적으로 메우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다만 긴급도입 품목 확대와 국가필수의약품 주문생산이 실제로 얼마나 폭넓게 적용될지는 예산 규모와 제약사 참여 의지에 따라 달라질 여지도 있다. 긴급도입 의약품은 국내 허가를 거치지 않은 상태로 도입되는 만큼, 후향적 안전성 모니터링과 데이터 축적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백신 품질시험 서비스와 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 출범 역시 제도 설계와 인력, 장비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산업계가 체감하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업계와 의료계에서는 희귀필수의약품 공급 안정화와 백신 개발 인프라 확충, 천연물의약품 품질관리 강화가 중장기적으로 국내 바이오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감염병과 희귀질환 대응 역량은 국가 보건안보의 핵심 축으로 떠오른 만큼, 어떤 품목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고 어떤 수준의 공공 지원을 제공할지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산업계는 이번 제도 변화가 현장의 수요와 맞물려 실질적인 공급망 강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