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호수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충북 겨울 여행이 주는 고요한 위로
요즘 사람들의 여행은 바쁘게 돌아다니기보다, 천천히 머무르며 숨을 고르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예전엔 볼거리 위주의 일정이 전부였다면, 지금은 자연과 나란히 걷고 고요를 느끼는 시간이 하나의 목적이 됐다. 사소한 코스 선택에도 ‘얼마나 편안해지는가’를 먼저 떠올리는 시대다.
충청북도는 이런 변화를 천천히 품어주고 있는 지역이다. 바다 대신 산과 호수가 중심이지만, 그래서 더 조용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충주호를 가르는 유람선, 설경에 둘러싸인 산사, 호수를 품은 옛 대통령 별장, 숲길 따라 이어지는 옛길까지, 겨울의 충북은 소음을 덜어낸 풍경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단양군 단성면에 자리한 충주호유람선 장회나루에서는 구담봉과 옥순봉을 비롯한 12가지 명승이 한눈에 들어온다. 40년 동안 사고 없이 운항을 이어온 유람선은 2023년 새 선박을 도입하며 더 안정적이고 쾌적한 여행을 준비했다.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 위에서 사람들은 말수가 줄어든다. 유리창 너머로 겹겹이 포개진 절벽과 깊은 물빛이 흐르고, 선장 안내 방송과 잔잔한 음악이 어우러지면 풍경은 어느새 하나의 긴 장면처럼 마음에 남는다. 선내외에는 포토존이 잘 마련돼 가족과 연인이 서로를 배경 삼아 사진을 남기고, 그 사진은 겨울 한가운데서 잠시 쉬어 갔던 기억의 증거가 된다. SNS에는 충주호를 배경으로 서 있는 실루엣 사진과 “생각을 내려놓게 되는 시간이었다”는 짧은 소감이 함께 올라온다.
보은 속리산 자락의 법주사는 충북 겨울 여행에서 빼놓기 어려운 공간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이 사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에 이름을 올리며 국제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았다. 경내에 들어서면 먼저 맞이하는 것은 빼어난 산세와 어우러진 고즈넉한 공기다. 국보 제55호 팔상전, 국보 제5호 쌍사자석등, 국보 제64호 석련지가 천천히 시선을 붙잡고,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은 겨울 햇빛을 받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눈이 내린 날이면 경내를 잇는 돌계단과 전각 지붕에 하얀 선이 그어지고, 방문객들은 자연스럽게 발소리를 낮춘다. 한 사찰 관계자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다가도 어느 순간 멈춰 서서 그냥 눈으로만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느꼈다며, 법주사가 주는 힘은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조용히 머무를 수 있는 여백’에 있다고 표현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의 청남대는 대청호를 끼고 있는 또 다른 쉼의 공간이다. 한때 대통령 전용 별장이었던 이곳은 지금, 시민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공원이 됐다. ‘남쪽에 있는 청와대’라는 이름처럼 한 나라의 중심이 한때 머물렀던 자리지만, 막상 마주하면 생각보다 소박한 길과 잔디, 호수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호수정원과 산책로는 계절마다 다른 색을 입지만, 겨울에는 특히 정적이 깊어진다. 대통령기념관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둘러보며 지나온 역사를 되짚는 이들도 많다. 안내를 맡은 한 관계자는 “어디까지 보고 뭘 꼭 해야 하는지보다, 각자 걸음을 맞추며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한 곳”이라 느꼈다고 전했다. 가족 단위 방문객들은 호수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 물결을 바라보다가, 불쑥 일상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곤 한다.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의 산막이옛길은 이름처럼 옛 마을을 잇던 길을 복원한 산책로다. 사오랑 마을에서 산막이 마을까지 이어지던 총 10리 길이 지금은 대부분 나무 데크로 정돈돼, 발이 편안한 걷기 여행을 돕는다. 숲, 산, 물이 서로 등을 기대고 있는 풍경 속을 걷다 보면 사람들은 속도를 자연스럽게 늦춘다. 한 여행자는 온라인 후기에 “길이 어렵지 않아 걷다 보면 생각이 천천히 풀린다”고 적었다. 유람선을 타고 물 위에서 길 주변을 둘러보는 이들도 있다. 같은 풍경을 다른 높이에서 바라보는 경험은, 일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돌아보게 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느린 산책을 ‘마음의 리셋’이라 부르며 “걷기와 자연 경관이 결합된 코스가 정신적 피로 회복에 특히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최근 국내 여행 패턴 조사에서는 자연 경관 감상과 산책·트레킹을 목적으로 한 여행 비중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숙박 일수를 줄이더라도, 하루를 온전히 걷고 쉬는 일정에 쓰겠다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디를 갔다’보다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를 더 중요하게 기억한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충북 여행기를 공유한 글 아래에는 “생각보다 멀지 않은데 기분은 아주 멀리 다녀온 느낌” “계획을 많이 세우지 않아도 만족도가 높았다”는 공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바쁜 스케줄보다, 아무 계획 없이 유람선 시간만 맞춰 나루터에 앉아 있던 시간이 오래 남았다는 고백도 눈에 띈다. 누군가는 법주사 눈 내린 사진 한 장을 올리고 “이 정도면 마음 정리 여행”이라고 적어 둔다.
전문가들은 이 흐름을 ‘조용한 휴식의 시대’라고 부른다. 휴가가 곧 소비와 이동의 연속이던 때와 달리, 이제 사람들은 여행지에서도 쉬어도 된다는 허락을 스스로에게 내리고 있다. 그만큼 몸과 마음의 여유가 귀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호수를 바라보는 시간, 산사 마당에 서 있는 몇 분, 숲길을 따라 이어지는 발자국이 오늘의 피로를 조금씩 덜어낸다.
충북의 겨울 여행지는 거창한 이벤트 대신, 고요한 풍경과 오래된 시간의 결을 건넨다. 유람선 위에서, 사찰 마당에서, 옛길을 걷는 발끝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자신을 돌아본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지금 이 변화는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나만의 조용한 여행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