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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가위로 ATM 전수 분석”…정밀의학 새 이정표

최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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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가위와 인공지능 기술이 결합한 차세대 정밀의학 연구가 국내에서 속속 성과를 내고 있다. 암과 대사질환을 겨냥한 혁신 신약 후보가 학계에서 발굴되면서, 한국발 바이오 신기술이 글로벌 정밀의료·신약개발 패러다임에 어떤 변화를 줄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연구 성과가 유전체 기반 맞춤치료와 염증성 질환 신약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임성기재단은 제5회 임성기연구자상 대상 수상자로 김형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교수를, 젊은연구자상 수상자로 한용현 강원대학교 약학대학 약학과 교수를 선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이 상은 생명공학 및 의약학 분야에서 신약개발에 유익한 응용이 가능한 업적을 남긴 한국인 연구자를 대상으로 매년 수여된다. 재단은 의학, 약학, 생명과학 분야 석학들로 구성된 별도 심사위원회를 통해 연구의 독창성과 산업적 파급력 등을 종합 평가해 수상자를 결정했다.

대상 수상자인 김형범 교수는 유전자 편집 기술, 이른바 유전자가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힌다. 김 교수 연구팀은 암 발생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진 ATM 유전자의 단일 염기 변이 2만7000여개를 전수 분석해 각 변이의 기능을 체계적으로 규명했다. ATM은 DNA 손상 복구와 세포 주기 조절에 관여하는 대형 유전자다. 변이 종류와 수가 방대해 기존 차세대염기서열분석 등 표준 분석 기술만으로는 개별 변이의 병적 의미를 정밀하게 평가하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김 교수는 이러한 병목을 해결하기 위해 차세대 유전자 편집 플랫폼으로 꼽히는 프라임에디팅을 활용했다. 프라임에디팅은 기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보다 특정 염기를 더 정밀하게 바꾸는 방식으로, 표적 부위에서 원하는 단일 염기 변이를 고효율로 유도할 수 있다. 연구팀은 세포 수준에서 ATM 유전자의 다양한 변이를 프라임에디팅으로 재현하고,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 모델 Deep ATM을 적용해 변이별 기능 이상 여부를 예측·검증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Deep ATM은 대규모 실험 데이터를 학습해 변이가 단백질 기능에 미치는 영향을 정량화하는 모델로, 실험과 계산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정밀의학 플랫폼으로 평가된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기존 방식으로는 판독이 어려웠던 희귀 변이까지 포함해 폭넓은 ATM 변이의 임상적 의미를 정리했다. 재단 측은 김 교수가 ATM 변이를 보유한 암 환자별로 최적 항암제 조합을 선별하고, 신약개발 단계에서 특정 약물에 대한 내성 변이 발생 가능성을 조기에 평가할 수 있는 핵심 기반 기술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ATM, BRCA 등 DNA 복구 유전자 변이는 표적항암제 선택과 예후 예측에 직결돼 글로벌 제약사들도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다. 특히 이번 기술은 기존 유전체 판독이 제공하지 못했던 기능 수준의 정보를 제공해, 환자 맞춤형 치료전략 수립과 동반진단 개발 경쟁에서 국내 연구의 위상을 높일 카드로 거론된다.

 

젊은연구자상을 받는 한용현 교수는 비만과 대사증후군에서 흔히 동반되는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의 악화 기전을 면역학·세포 생물학 관점에서 파고들었다. 한 교수 연구팀은 염증성 사이토카인 IL-18과 그 길항제 역할을 하는 단백질 IL-18BP가 서로를 견제하며 염증과 섬유화 정도를 조절하는 새로운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규명했다. IL-18은 선천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신호 단백질로,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간세포 손상과 섬유화를 유도해 지방간염이 간경변증으로 진행되는 핵심 촉매로 지목돼 왔다.

 

연구팀은 IL-18BP의 구조와 체내 대사 특성을 정밀 분석해, 이 단백질의 반감기를 연장하고 표적 조직으로의 약물 전달 효율을 개선한 지속형 바이오신약 APB-R3를 설계했다. APB-R3는 일종의 장기지속형 생물학적 길항제로, 체내에서 IL-18과 안정적으로 결합해 과도한 염증 반응을 완충하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한 교수는 이 후보물질을 교원창업기업과 공동 연구 형태로 개발해, 학계와 창업 생태계를 연계한 기술사업화 모델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임상 단계에서 APB-R3는 지방간염 동물모델에서 간 조직 내 염증 지표를 유의미하게 낮추고, 섬유화 세포 활성을 억제해 질환이 간경변증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차단하는 효과를 보였다. 재단에 따르면 이 후보물질은 스틸병,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 아토피질환 등 기존 자가염증질환뿐 아니라 지방간염에서도 적응증 확대 가능성이 확인됐다. 업계에서는 향후 IL-18을 정밀 표적하는 계열 내 최초, 이른바 퍼스트 인 클래스 치료제로 발전할 여지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 바이오 시장에서는 이미 유전자 편집 기반 정밀의학과 염증성 사이토카인 표적 치료제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크리스퍼 기반 유전자 치료제와 IL 계열 사이토카인을 겨냥한 항체·융합단백질 약물이 임상 단계에 다수 진입한 상태다. 이번 임성기연구자상 수상 과제는 한국 연구진이 이 같은 기술·시장 흐름을 따라가는 수준을 넘어서, 유전자 기능 전수 분석과 지속형 단백질 신약 설계라는 고난도 영역에서 원천기술을 축적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다만 실제 상용화를 위해서는 규제기관의 엄격한 안전성·유효성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유전자 편집 기반 정밀의학은 변이 해석 알고리즘의 검증, 데이터 편향성 점검, 의료현장에서의 의사결정 지원 도구로서의 역할 범위 설정 등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바이오의약품 역시 장기 투여 시 면역원성, 예기치 않은 면역계 교란 가능성을 면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는 지적이 지속된다. 국내에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보건복지부를 중심으로 첨단재생바이오법, 혁신의료기기 제도 등을 통해 관련 규제 틀을 정비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김창수 임성기재단 이사장은 올해 수상자들의 연구가 정밀의학과 신약개발 분야의 지평을 넓힌 의미 있는 성취라고 평가했다. 재단은 앞으로도 국내 연구 환경 조성과 인류 건강 증진을 위한 지원을 이어가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업계는 이번에 주목받은 유전자가위 기반 변이 기능 지도 기술과 IL-18 표적 지속형 바이오신약 플랫폼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빠르게 임상·사업화 단계로 이동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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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범#임성기연구자상#한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