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WBD 인수 추진…글로벌 OTT 재편 분기점
넷플릭스의 워너브라더스디스커버리 인수 추진이 글로벌 미디어와 IT 플랫폼 산업의 지형을 흔들고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전통 스튜디오와 극장 중심이던 콘텐츠 유통 구조를 흡수하는 흐름이 가속되면서, 이번 거래가 단순한 인수합병을 넘어 디지털 플랫폼 독점 구도의 분수령이 될 것이란 관측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콘텐츠 제작과 유통, 소비 전 과정을 한 손에 쥔 초대형 플랫폼의 등장이 극장가와 독립 제작사, 국내 OTT 생태계까지 연쇄적인 구조조정을 촉발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동시에 각국 규제 당국의 반독점 심사와 플랫폼 규제 강화 움직임도 한층 거세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넷플릭스는 5일 현지 시간 기준으로 워너브라더스 영화 및 TV 스튜디오, HBO 맥스, HBO를 포함한 WBD 핵심 자산을 인수하는 최종 계약 체결을 발표했다. 거래 규모는 약 121조원 수준으로, 내년 3분기 WBD의 글로벌 네트워크 사업부 디스커버리 글로벌 분리 이후 마무리되는 일정이다. 규제 심사와 구조 재편을 전제로 한 대형 딜인 만큼, 스트리밍과 전통 미디어가 결합한 복합 플랫폼 탄생을 예고하는 수순이라는 평가다.

기술적으로는 글로벌 최대 구독 기반 스트리밍 인프라를 보유한 넷플릭스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제작 및 배급 체계를 자사 플랫폼 구조 안으로 흡수하는 형태다. WBD는 이미 자체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를 통해 해리포터 신규 드라마, HBO 오리지널 시리즈를 공급하고 있고, 극장용 블록버스터 IP도 대거 보유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이 트래픽과 제작 파이프라인을 통합 운용함으로써, 추천 알고리즘과 개인화 인터페이스에 초대형 IP 라이브러리를 결합해 시청 시간과 락인 효과를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이번 인수가 성사될 경우 스트리밍 기술 경쟁의 축이 단순한 화질, 전송 속도 수준을 넘어, 데이터 기반 콘텐츠 기획과 글로벌 동시 배급 시스템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넷플릭스는 시청 패턴 분석 알고리즘과 A/B 테스트 기반 인터페이스 최적화 역량을 활용해, WBD의 해리포터 시리즈, 왕좌의 게임, 프렌즈 같은 메가 IP를 지역별, 세대별로 세분화된 타깃에 맞춰 재편성할 수 있다. 플랫폼 내부에서의 노출 빈도 조절, 스핀오프 편성, 인터랙티브 콘텐츠 전환 같은 실험도 기술적으로 용이해진다.
시장 측면에서 가장 먼저 충격이 전파되는 영역은 영화와 드라마 제작 생태계다. 이미 넷플릭스를 포함한 글로벌 OTT가 오리지널 제작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온 가운데, 메이저 스튜디오까지 흡수될 경우 독립 제작사와 중소 스튜디오의 협상력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콘텐츠 수급 채널이 소수 글로벌 플랫폼으로 좁혀지면, 제작 단가는 단기적으로 올라가더라도 유통 의존도가 높아지고, 계약 구조가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서는 영화 콘텐츠 산업이 사실상 플랫폼 종속 구조로 들어가는 가속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극장가는 이미 초긴장 상태다. WBD는 배트맨, 듄 등 할리우드 초대형 블록버스터를 제작하고, 극장 개봉을 통해 글로벌 흥행을 견인해 온 스튜디오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관객의 시청 습관이 OTT 중심으로 이동한 상황에서, 넷플릭스가 WBD 제작 및 배급 시스템을 자사 플랫폼 안으로 끌고 들어가 대작 영화의 극장 개봉 비중을 축소한다면, 극장 체인의 수익 모델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미국 작가조합과 배우조합이 이번 거래를 두고 경쟁을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는 합병이라고 비판하는 배경이다.
글로벌 비교를 해보면, 디즈니는 디즈니플러스에 마블과 스타워즈, 픽사 등 자사 IP를 집중시키는 전략을 이미 택했다. 아마존도 MGM 인수를 통해 제임스 본드 등 영화 IP를 확보하고 프라임 비디오와 연계한 통합 생태계를 구축 중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넷플릭스는 그동안 외부 스튜디오와의 라이선스 계약, 자체 제작 확대로 대응해 왔지만, 메이저 스튜디오 인수를 통한 수직 계열화는 새로운 단계라는 평가다. 글로벌 스트리밍 시장에서는 IP와 기술, 배급망을 동시에 확보한 소수 기업 중심의 과점 구도가 더욱 공고해질 수 있다.
다만 미국 내 규제 리스크는 변수로 꼽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시장 점유율 문제를 거론하며 관여 의지를 내비친 데서 보듯, 경쟁 제한 여부를 둘러싼 정치권과 규제 당국의 심사는 상당히 까다로울 전망이다. 인수 무산 시 발생하는 위약금 규모는 약 8조6000억원에 달하지만, 넷플릭스 입장에서는 파라마운트 등 경쟁자를 견제하고 일정 기간 WBD의 독점적 콘텐츠를 시장에서 묶어두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최소 1년 이상 협상과 심사가 이어지는 동안 넷플릭스가 다양한 전략적 카드를 꺼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국내 미디어 산업에는 또 다른 압박 요인이 된다. 이미 한국 시장에서 독보적 1위 OTT로 자리 잡은 넷플릭스의 영향력이 글로벌 IP 결합으로 더 커질 경우, 국내 OTT가 이용자 기반과 콘텐츠 경쟁력 모두에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 추진이 국내 경쟁력 제고의 핵심 카드로 거론됐지만, 주요 주주인 KT의 반대로 연내 마무리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도 변수다. 합병이 지연되는 사이 넷플릭스는 글로벌 IP와 K콘텐츠 투자력을 앞세워 가입자를 더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티빙은 글로벌 진출 원년을 선언하며 HBO 맥스를 통해 17개국에 진출했고, CJ ENM은 WBD와 K콘텐츠 공동 제작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은 바 있다. 그러나 WBD가 넷플릭스로 편입될 경우, 이 같은 협력 구조의 지속 가능성과 조건 재협상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국내 플랫폼 입장에서는 글로벌 IP 접근성에 대한 협상력이 약해질 수 있고, 넷플릭스와의 콘텐츠 수급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공산이 크다.
규제와 정책 측면에서 보면, 미국에서 제기되는 반독점 우려는 한국 시장에도 직간접적인 함의를 갖는다. OTT와 방송, 영화 산업 전반이 글로벌 플랫폼 중심 구조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공정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규제 체계와 동시에 자국 플랫폼을 지원할 수 있는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한 국내 OTT 관계자가 기존 방식으로는 미디어 업계가 구조적 변화를 버티기 어렵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문가들은 넷플릭스와 WBD의 결합이 실제로 성사되느냐와 별개로, 플랫폼 중심의 콘텐츠 생태계 전환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스트리밍 기술과 데이터 분석, 글로벌 배급망을 쥔 소수 기업이 IP와 제작 생태계까지 장악하는 구조가 강화되면, 각국 정부와 산업계가 어떤 대응 전략을 마련하느냐가 향후 5년 미디어 시장 판도를 가르는 변수가 될 전망이다. 산업계는 이번 인수전이 실제로 시장에 어떤 구조 변화를 가져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