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공장 인수 마친 삼성바이오, 1조 수주로 CDMO 재편 주도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 CDMO 시장이 공급망 재편과 차세대 모달리티 확산을 축으로 다시 짜이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미국 생산거점 확보와 1조원대 수주를 동시에 발표하면서 글로벌 상위권 CDMO 판도 변화에 속도가 붙는 모양새다. 업계에서는 이번 행보를 미국 중심 의약품 관세와 공급 리스크를 피하면서도, 차세대 바이오의약품 생산 능력을 키우는 투트랙 전략의 분기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2일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의 미국 바이오의약품 생산시설 인수 계약 체결과 함께, 유럽 소재 제약사와 총 1조2200억원 규모의 위탁생산 계약 3건을 동시에 공시했다. 인적분할 이후 순수 CDMO 체제로 전환한 뒤 첫 1조원대 대형 수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회사는 이 두 건을 축으로 글로벌 거점 확대, 생산능력 확대, 포트폴리오 확장을 묶은 이른바 3대축 확장 전략을 본격 가동하는 구상이다.

이번에 인수한 시설은 미국 메릴랜드주 락빌에 위치한 휴먼지놈사이언스 바이오의약품 생산공장이다. 인수 주체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미국 자회사 삼성바이오로직스 아메리카이며, 인수 금액은 2억8000만달러, 한화 약 4136억원 수준이다. 자산 인수 절차는 2025년 1분기 내 마무리하는 일정이다. 락빌 공장은 미국 메릴랜드 바이오 클러스터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총 6만리터 규모 원료의약품 DS 생산 역량을 보유했다. 임상용부터 상업용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항체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 구성을 이미 갖춘 상태라, 신규 증설 없이도 즉시 가동 가능한 플랫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기존 GSK 생산 계약을 고스란히 승계해 대규모 CMO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현지 인력 500여명도 전원 고용 승계하면서 공정 운영 노하우와 품질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가는 방식이다. 회사는 중장기 수요와 가동률을 감안해 탱크 추가나 공정 전환을 포함한 단계적 증설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락빌 부지는 기존 유럽·미국계 빅파마가 밀집한 메릴랜드 바이오 허브에 위치해 있어, 신규 고객사 확보와 공동개발형 CDMO 모델 확대에도 유리한 입지를 확보한 셈이다.
기술 관점에서 보면 락빌 공장은 항체의약품 대량생산에 최적화된 세포배양과 정제 공정을 기반으로 한다. 세포주 개발과 업스트림 공정에서의 배양 최적화 기술, 다운스트림에서의 고효율 정제 공정 설계 등이 주요 역량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송도에서 축적한 대형 배양조 운영 경험과 공정 자동화 시스템을 이식해 생산 효율과 수율을 끌어올린다는 전략이다. 기존 GSK 공정 대비 공정 자동화 비율을 높이고, 배양 조건 최적화를 통해 동일 라인에서 연간 투스루풋을 몇십 퍼센트까지 높일 여지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 내 생산기지는 정책 리스크 관리 수단으로도 작동할 전망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의약품 관세와 자국 생산 유인 정책 논의가 강화되고 있어,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에 현지 생산거점 유치는 필수가 돼 가는 분위기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북미 내 실물 생산 기반을 확보함으로써 관세와 수입 규제 변화에 따른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고, 북미 고객의 주문 변동에도 더욱 빠르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미국 식품의약국 FDA와의 인허가 커뮤니케이션, 현지 물류·창고 네트워크와의 연계도 쉬워져 상업 생산 진입 속도 개선이 기대된다.
같은 날 발표된 1조2200억원 규모 유럽 제약사 위탁생산 계약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수주 파이프라인이 질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객사와 제품명, 개별 계약 세부 조건은 비공개지만, 계약 기간이 2030년 말까지로 설정된 점을 감안하면 장기 상업 생산 물량 비중이 높은 것으로 풀이된다. 회사는 이번 수주와 방금 발표한 미국 공장 인수 간 직접적인 연관성을 밝히지 않았으나, 유럽과 북미를 양대 축으로 삼는 글로벌 공급망 설계가 본격화됐다는 해석이 업계에서 나온다.
국내 생산 인프라 확대도 동시에 추진 중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인천 송도국제도시 11공구 부지를 추가 확보하며 제3바이오캠퍼스 조성에 들어갔다. 제3바이오캠퍼스는 기존 항체의약품 중심 생산 구조를 넘어 세포·유전자치료제 CGT, 항체백신, 펩타이드 등 이른바 차세대 모달리티 전반을 담아내는 전략 거점으로 설계된다. 모달리티는 약물이 몸에서 작용하는 형태와 기전을 의미하는데, 글로벌 제약사는 항체의약품에서 CGT와 mRNA, ADC 등으로 파이프라인을 다변화하는 추세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에 맞춰 각 모달리티별 전용 설비와 공정을 갖춘 멀티플랫폼형 캠퍼스를 지향하고 있다.
이미 회사는 차세대 모달리티 대응을 위한 구체적인 생산기술도 단계적으로 확보해 왔다. 2021년에는 메신저 리보핵산 mRNA 기반 의약품 생산역량을 구축해 원료 합성부터 지질나노입자 LNP 제형화까지 전 공정을 소화할 수 있게 됐다. 2024년 1분기부터는 항체약물접합체 ADC 전용 생산시설 가동에 돌입했다. ADC는 항체에 세포독성 약물을 결합해 암세포 등 특정 표적에만 약물을 집중 전달하는 기술로, 약효는 극대화하고 전신 부작용은 낮추는 차세대 항암제 플랫폼으로 평가된다. CDMO 입장에서는 고부가가치 공정인 만큼 수익성 개선 여지도 크다.
연구개발과 전임상 단계 수요를 겨냥한 서비스 다각화도 병행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6월 삼성 오가노이드 서비스를 선보이며 임상시험수탁 CRO 영역으로 진출했다. 오가노이드는 실제 장기 조직 구조와 기능을 모사하는 3차원 미니 장기 기술로, 신약 후보물질의 효능과 독성을 보다 인간에 가깝게 예측하는 데 활용된다. 이를 통해 고객사의 후보물질 선별과 전임상 설계 효율을 높이고, 이후 생산 단계 CDMO 계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통합 서비스 모델 구축을 노리는 모습이다.
전체 생산능력 측면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미 글로벌 최대급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 인천 송도에 구축한 1~5공장 합산 생산규모는 78만5000리터로, 단일 기업 기준 세계 최대 바이오의약품 생산능력이다. 회사는 송도 제2바이오캠퍼스에 6, 7, 8공장을 2032년까지 추가로 건설해 총 132만5000리터 규모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대형 탱크 중심 항체의약품 상업 생산 수요뿐 아니라, 파이프라인 양산 단계 진입 시점을 노리는 글로벌 제약사의 장기 공급 계약 수요도 선제적으로 흡수하겠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CDMO 시장에서는 스위스 론자, 독일 자이텍 등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북미와 유럽, 아시아 3대 권역에 생산거점을 동시에 확보하는 기업이 공급망 안정성과 고객 대응 측면에서 우위를 점할 것이라는 분석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번 락빌 공장 인수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그 조건에 한 발 더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미국 내 생산 중인 기존 제품 계약을 승계한 만큼, 단순 설비 인수가 아니라 수익성이 검증된 자산과 고객 베이스를 함께 가져온 딜 구조라는 점이 주목된다.
정책·규제 환경도 CDMO 기업 전략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미국과 유럽은 바이오의약품 제조시설에 대해 GMP 규제와 품질관리 요건을 강화하는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동시에 자국 내 생산 인센티브 정책과 국제 공급망 리스크 관리 전략이 결합되면서, 해외에만 공장을 둔 기업은 허가와 관세, 물류 비용 측면에서 불리해질 여지도 있다. 이번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미국 공장 인수는 이러한 규제·정책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포석으로도 읽힌다.
업계에서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3대축 확장 전략을 차질 없이 실행할 경우, 단순 생산기지 제공을 넘어 초기 연구부터 상업 생산까지 전 주기를 아우르는 통합 바이오솔루션 기업으로 진화할 가능성도 제기한다. 한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 한국을 잇는 생산 네트워크와 차세대 모달리티 생산기술이 결합되면, 글로벌 빅파마가 원하는 장기 파트너 CDMO로서 입지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관계자는 이번 GSK 공장 인수를 통해 3대축 확장 전략을 본격 추진하며 글로벌 톱 CDMO로의 도약 속도를 높이겠다고 강조했다. 산업계는 대형 투자가 예고된 가운데, 이 확장 전략이 실제 상업 생산 수요와 규제 환경 변화에 얼마나 정교하게 맞춰질지에 주목하고 있다. 기술과 생산능력, 정책 대응력 간 균형 확보가 글로벌 CDMO 재편의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