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만능주의 넘어서자"…KISDI, 2035년 제도 개편 촉구
2035년이면 인공지능은 사람의 지시에만 반응하는 수동적 도구를 넘어, 스스로 상황을 인지하고 행동을 설계하는 자율 에이전트로 진화해 산업과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으로 전망됐다. 특히 로봇과 센서, 자율주행차에 탑재된 물리적 AI가 현실 세계를 직접 제어하면서 생산 현장과 생활 환경을 동시에 재구성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학계는 이러한 구조 변화가 경제 성장의 J커브를 만들 수 있지만, 제도 정비가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소수 기업과 엘리트에 권한과 부가 집중되는 AI 만능주의 사회로 기울 수 있다고 우려한다. AI 기술 발전을 전제로 한 의도적 공진화, 즉 기술과 제도를 함께 설계하는 전략이 향후 10년 산업 경쟁력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4일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개최한 제5회 디지털 대전환 메가트렌드 컨퍼런스에서 문아람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2035 AI 대전환 메가트렌드라는 주제로 향후 10년의 AI 변화상을 제시했다. 그는 단순한 알고리즘 성능 향상이 아니라, AI가 노동 시장과 사회 규칙, 부의 분배 구조까지 재편하는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날 행사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학계, 산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해 AI로 발견한 미래, 우리의 준비된 비전이라는 화두를 공유했다.

문 연구위원이 제시한 2035년 AI의 4대 메가트렌드는 에이전트화, 다결절화, 탈진실화, 물리융합화다. 현재의 AI는 프롬프트를 입력해야만 응답을 생성하는 수동형 시스템에 가깝지만, 에이전트화된 AI는 목표를 부여받으면 스스로 세부 작업을 쪼개고,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하며, 여러 도구를 호출해 과업을 완결하는 구조로 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용자는 업무 전 과정을 나눠 지시하기보다 결과에 대한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고, 마지막 승인만 담당하는 형태로 역할이 이동한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현재는 보고서 작성을 위해 사용자가 챗봇에 질문을 던지고, 따로 이미지 생성 모델을 호출해 시각 자료를 만드는 식으로 작업을 나눠야 한다. 반면 2035년에는 기획 의도와 결과물 형식만 지정하면 AI 에이전트가 관련 자료 수집, 초안 작성, 표와 그래프 설계, 시각 자료 생성까지 일괄 수행하고, 인간은 이 결과를 검증하고 수정 방향을 제시하는 흐름이 될 수 있다. 반복적·단순 작업은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기획과 조정 업무까지 AI가 흡수하면서, 인간의 업무는 메타 수준의 판단과 조율에 집중되는 구조다.
물리융합화는 지금까지 소프트웨어 영역에 머물렀던 AI가 하드웨어와 결합해 현실 공간의 행위자로 자리잡는 흐름을 뜻한다. 제조 공장에서는 로봇과 AI 비전 시스템, 공정 센서가 통합된 자율 생산 라인이 등장하고, 물류 창고와 도심 라스트마일 배송 구간에서 자율주행 로봇과 드론이 밀집 운용될 가능성이 크다. 가정과 도시 인프라에서는 생활 패턴을 학습한 서비스 로봇과 지능형 건물 관리 시스템이 에너지 사용, 시설 유지보수, 안전 관리를 스스로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측됐다.
반면 생성형 AI 고도화는 탈진실화라는 위험도 키울 것으로 전망됐다. 텍스트와 이미지, 음성, 영상이 모두 자연스럽게 합성되는 멀티모달 생성 기술이 일상화되면, 진짜와 가짜를 직관적으로 구분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 연구위원은 AI가 여론 형성 과정에서 서사와 담론을 생산·증폭하는 핵심 주체로 부상할 경우, 사실 검증보다 감정적 설득력이 강한 콘텐츠가 여론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그만큼 인간이 직접 구축한 신뢰 네트워크와 검증된 출처의 정보가 희소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제 측면에서 AI는 코로나19 이후 정체된 성장 경로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도약의 기회로 평가됐다. AI를 통한 업무 자동화와 의사결정 고도화가 일정 임계점을 넘어서면, 생산성이 한 번에 꺾어 올려지는 J커브 성장 패턴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AI 역량과 데이터, 자본을 갖춘 주체에 성장 효과가 집중되면서 노동 시장과 소득 분배에서 K자형 양극화가 심화될 가능성도 크다고 진단했다.
특히 청년층 고용 구조에 대한 경고가 나왔다. 기업 내에서 단순 반복 업무는 신입 인력이 숙련을 쌓는 진입 계단 역할을 해 왔지만, 이 단계의 작업이 AI 자동화의 1차 목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연구위원은 비숙련 인력이 실제 업무를 경험하며 역량을 키울 공간이 사라질 경우, 청년들이 숙련 노동자로 성장하는 사다리 자체가 붕괴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이는 단기 취업난을 넘어 장기적으로 국가 인적 자본 축소와 혁신 역량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
KISDI는 현재 한국이 시장 주도 경쟁사회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의 이윤 극대화와 기술 우위를 확보하는 데 정책과 사회 시스템이 맞춰져 있고, AI 인프라도 민간 대기업과 일부 빅테크에 집중되는 구조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방향이 유지되면 2035년 한국 사회는 극소수 엘리트와 거대 기업이 AI와 데이터를 독점하고, 다수의 시민은 알고리즘의 결정에 종속되는 AI 만능주의 사회로 수렴할 위험이 크다고 진단했다.
실제 시민과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에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미래로 AI 만능주의 사회가 꼽혔다. 반대로 가장 선호되는 미래상은 AI 협력번영 사회였다. 대규모 연산 인프라와 데이터 자원을 공공재에 가깝게 공유하고, AI 활용 성과를 사회 구성원이 함께 나누는 구조가 이상적인 비전으로 제시됐다. 교육과 복지, 지역 격차 해소에 AI를 적극 활용하되, 기술과 부가 하나의 계층에 집중되지 않도록 제도 장치를 강화하는 방향이 핵심 축이다.
문 연구위원은 이러한 전환을 위해 기술 발전과 제도 설계를 분리해서 보지 말고, 속도와 방향을 맞춰가는 의도적 공진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기술이 등장한 뒤 사후적으로 규제를 마련하는 방식으로는 AI 대전환의 사회적 충격을 흡수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는 AI 산업 전환의 혁신과 공정, AI 자원의 공공성과 지속 가능성, 일자리 이동성과 안정성, 기여에 대한 환류와 부의 선순환, 보편적 역량 기반의 AI 주권자 양성, 협력 기반 개방형 거버넌스 등 6대 신제도 아젠다를 제안했다.
AI 산업 전환의 혁신과 공정은 대규모 모델 개발과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특정 기업에 대한 규제 부담과 진입 장벽을 조정해, 혁신을 촉진하면서도 공정 경쟁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AI 자원의 공공성과 지속 가능성은 데이터와 컴퓨팅 파워를 국가적 인프라로 보고, 공공 클라우드나 공공 데이터 허브를 통해 스타트업과 연구기관이 접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방향을 담고 있다. 또한 일자리 이동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업종 전환 교육, 전직 지원 시스템, 실업 안전망을 단계적으로 확충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기여에 대한 환류와 부의 선순환은 AI 생산성과 이익이 기술 투자자뿐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에게 돌아가도록, 세제와 이익 공유 제도를 설계하자는 제안이다. 보편적 역량 기반 AI 주권자 양성은 초중등 교육부터 평생교육에 이르기까지 AI 리터러시와 데이터 활용 교육을 기본 역량으로 포함해, 시민 개개인이 AI와 상호작용할 때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 통제자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방향이다. 협력 기반 개방형 거버넌스는 정부·기업·시민사회가 정책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는 다자 플랫폼을 구축해 AI 규범과 표준을 공동으로 만들어가자는 내용이다.
정부도 AI 대전환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 지원 의지를 드러냈다. 류제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은 행사에서 AI가 이미 창작 분야까지 확장된 상황에서 10년 뒤 기술 수준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국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AI의 진화 속도가 상상을 넘어서는 만큼 학계와 산업계가 체계적인 대응 전략을 공동으로 마련해야 하며, 정부도 AI 정책 수립과 미래 제도 설계 과정에서 실질적 지원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2035년 AI가 선택할 경로는 아직 고정되지 않았다. 자율 에이전트와 물리융합 AI가 생산성과 편의를 극대화하는 도구로 자리잡을지, 알고리즘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권력 집중을 심화시키는 장치가 될지는 향후 10년간 마련될 제도와 규칙에 달려 있다. 산업계와 정책 당국은 AI의 기술 경쟁만큼이나 제도 혁신과 사회적 합의를 병행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됐다. 산업계는 이번 논의가 실제 정책과 시장 구조 개편으로 이어질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