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이 신약 수출 견인”…K제약바이오 20조 돌파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에서 플랫폼 기반 기술 수출이 새로운 성장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러 질환에 공통 적용 가능한 신약개발 플랫폼과 항체약물접합체 ADC, 알츠하이머 등 퇴행성뇌질환 타깃 기술이 결합되면서 기술 거래 규모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글로벌 빅파마가 한국 플랫폼을 신약 파이프라인의 핵심 소스로 활용하는 흐름이 뚜렷해지면서, 향후 임상과 후기 개발 단계에서 국내사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확장될지가 산업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집계에 따르면 17일 기준 올해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누적 기술 수출 규모는 20조3898억원으로 나타났다. 금액을 공개하지 않은 계약을 제외한 수치로, 이전 최대 실적이었던 2021년 13조8047억원을 크게 웃도는 기록이다. 일회성 후보물질 이전을 넘어, 여러 물질과 적응증에 반복 활용 가능한 플랫폼 기술 딜이 급증한 것이 전체 규모를 끌어올린 요인으로 분석된다.

플랫폼은 하나의 기술이나 시스템으로 다양한 신약 후보를 효율적으로 발굴하는 공통 기반이다. 특정 단백질 구조를 자동 설계하는 알고리즘이나, 약물 전달 경로를 조절하는 분자 공학 기술처럼 일단 원리가 확립되면 여러 질환과 표적에 응용할 수 있다. 개발사는 동일 플랫폼으로 여러 파이프라인을 병렬 구축할 수 있고, 글로벌 제약사는 검증된 플랫폼을 도입해 개발 기간과 초기 실패 비용을 줄일 수 있어 기술 거래 선호도가 높아지는 구조다.
대표적인 사례가 에이비엘바이오의 뇌 전달 플랫폼 그랩바디 B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달 글로벌 제약사 시가총액 1위 일라이릴리와 그랩바디 B 기술 이전 계약을 최대 25억6200만달러, 약 3조7487억원 규모로 체결했다. 올해 4월에도 GSK에 동일 플랫폼을 최대 3조9623억원 규모로 이전한 바 있다. 그랩바디 B는 뇌혈관장벽 BBB를 통과하도록 단백질과 항체 구조를 설계해 뇌 속 약물 농도를 높이는 것이 핵심 원리로, 알츠하이머와 파킨슨병 등 퇴행성뇌질환 치료제 개발의 병목을 풀 수 있는 전달 플랫폼으로 평가받고 있다.
투여 경로를 바꾸는 제형 플랫폼도 주목받고 있다. 알테오젠은 지난 3월 아스트라제네카에 ALT B4 기술을 최대 13억5000만달러, 약 1조9640억원 규모로 이전했다. ALT B4는 정맥주사용 단백질 의약품을 피하주사용으로 전환하는 히알루로니다제 기반 플랫폼이다. 약물이 체내에 흡수되는 속도와 분포를 제어해 환자 편의성을 높이고 병원 투약 시간을 단축하는 효과가 있어 항암제와 면역질환 치료제 등 다양한 블록버스터 의약품에 접목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전자와 RNA 편집 영역에서도 한국 플랫폼이 글로벌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알지노믹스는 지난 5월 일라이릴리와 최대 1조9000억원 규모의 유전자 치료제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자사가 보유한 트랜스 스플라이싱 리보자임 기반 RNA 편집 플랫폼을 활용해 특정 RNA 염기서열을 정밀 교정하는 치료제 개발이 목적이다. 알지노믹스는 RNA 치환효소 기술과 원형 RNA 서열 설계 플랫폼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어 희귀유전질환과 유전성 신경질환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항체약물접합체 ADC도 올해 기술 수출의 또 다른 축으로 부상했다. ADC는 암세포를 인식하는 항체와 강력한 세포독성 약물을 링커로 결합해 표적 암세포에만 약물을 전달하는 항암 플랫폼으로, 일종의 유도미사일형 치료 기술로 불린다. 지난 10월 에임드바이오는 베링거인겔하임과 최대 9억9100만달러, 약 1조4000억원 규모의 ADC 신약 물질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베링거인겔하임은 이번 계약으로 에임드바이오가 발굴한 신규 종양표적 기반 ADC 자산에 대한 개발과 상업화 권리를 확보했다. 독자적인 표적 발굴과 약물 결합 기술을 묶어 플랫폼화한 사례라는 점에서 추가 적응증 확장이 가능한 포맷으로 평가된다.
퇴행성뇌질환 분야에서도 타우 단백질을 정밀 타깃으로 삼는 정밀의학형 플랫폼이 가시화되고 있다. 아델은 지난 16일 사노피와 알츠하이머병 치료 물질 ADEL Y01에 대한 전 세계 독점 개발 및 상업화 계약을 최대 10억4000만달러, 약 1조5300억원에 체결했다. ADEL Y01은 타우 단백질 중에서도 정상 기능에는 필요하지만 병적 응집을 일으키는 아세틸화된 타우, 특히 acK280 변형만을 선택적으로 인식해 제거하도록 설계됐다. 독성 타우만 골라 제거하는 기전이 검증될 경우, 동일 플랫폼 논리로 파킨슨병과 전두측두엽 치매 등 다른 신경퇴행성질환으로 확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업계 관심이 크다.
시장 진출 방식도 단순 기술이전에서 권역별 상업화 파트너십까지 다양해지는 모습이다. 아리바이오는 지난 6월 아랍에미리트 국부펀드 ADQ 산하 아르세라와 총 6억달러, 약 8200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해 중동과 중남미, 아프리카, 독립국가연합 등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제공했다. 개발 중심 거래에 머물렀던 국내사가 특정 신약 후보의 글로벌 상업화 구조 설계에도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셈이다.
대사질환 영역에서는 RNA 간섭 기반 치료 플랫폼이 부상하고 있다. 올릭스는 지난 2월 일라이릴리와 9116억원 규모의 기술 수출 계약을 맺고 대사이상 지방간염 MASH와 심혈관 및 대사질환 치료제 OLX702A 개발 협력을 시작했다. 조직 특이적 전달과 표적 유전자 발현 억제 기술이 결합된 RNAi 플랫폼으로, 같은 메커니즘을 공유하는 여러 대사질환으로 파이프라인을 확장할 수 있는 구조다.
글로벌 제약바이오는 이미 플랫폼 기반 오픈이노베이션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상황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형 제약사가 딥러닝 기반 구조 설계, 합성 경로 예측, 임상 성공률 예측 등 AI 약물개발 플랫폼 업체와의 대형 계약을 잇달아 체결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플랫폼과 초기 후보물질을 제공하고, 임상 설계와 대규모 글로벌 시판 경험을 가진 해외사가 후기 개발과 허가, 상업화를 담당하는 역할 분담이 일반적이다.
다만 플랫폼 중심 기술 수출이 장기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규제와 임상 데이터 축적이 관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다수 계약은 비임상 또는 초기 임상 단계에서 체결돼 향후 임상 2상과 3상에서 효능과 안전성이 입증돼야 마일스톤과 로열티 수익이 현실화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미국 FDA를 비롯한 각국 규제당국은 유전자 편집과 RNA 치료제, 뇌질환 타깃 바이오의약품 등에 대해 장기 추적 데이터를 요구하는 추세여서, 국내사가 글로벌 임상 운영 역량을 얼마나 내재화할지가 수익 구조를 좌우할 전망이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플랫폼은 반복 가능한 혁신 구조를 만들어내는 성장 전략이라고 진단하면서, 지금까지는 기술 이전 중심 전략에 무게가 실렸다면 앞으로는 플랫폼 기술의 실제 임상 검증과 후기 개발 역량 확보, 글로벌 공동 개발을 통한 신뢰 축적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계는 K제약바이오의 플랫폼 수출이 단발성 계약에 그칠지, 장기 로열티와 공동 상업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모델로 정착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