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위로 겨울바람이 흐른다”…진주에서 걷고 쉬고 먹는 역사 여행
요즘 남쪽 도시의 겨울을 찾는 이들이 늘었다. 눈 덮인 산 대신 잔잔한 강과 오래된 성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 여행을 택하는 것이다. 예전엔 성곽과 누각이 교과서 속 역사로만 여겨졌지만, 지금은 커피 한 잔과 따뜻한 간식을 곁들이는 하루의 일상이 됐다. 사소한 동선의 변화 속에, 여행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경남 진주시의 시간은 남강을 따라 흘러간다. 평야를 가르며 유유히 흐르는 강을 중심으로 성곽이 둘러앉고, 그 위에 누각이 걸터앉은 풍경은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겨울의 장면이다. 추위를 피하겠다며 겨울 여행을 미루던 사람들조차, SNS에 올라온 강변 사진과 성벽 산책 인증을 보며 진주행을 고민하게 된다. “찬 공기를 마시면서도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해진다”는 여행 후기들이 그만큼 눈에 띈다.

진주 여행의 시작점으로 가장 많이 선택되는 곳은 본성동의 진주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장군이 왜적을 막아낸 격전지였던 이곳은, 지금은 남강을 굽어보는 산책 코스로 기억된다. 성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서면, 도시의 소음이 한 톤 낮아진 듯한 기분이 든다. 성곽을 따라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한쪽으로는 고즈넉한 나무들이 계절을 견디고 서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겨울빛을 머금은 강물이 조용히 흐른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지만, 그 공기 안에 오래된 호국의 시간과 도시의 일상이 겹쳐 보인다.
성벽 위에 서서 남강을 내려다보는 순간, 여행객들은 저마다 다른 감정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단지 ‘좋은 풍경’을 찍어두고 싶어 휴대전화를 꺼낸다. 전투와 비극의 기억을 품은 장소가 지금은 산책과 데이트, 가족 나들이의 무대가 된 셈이다. “가볍게 산책하러 왔는데, 설명문을 읽다 보니 괜히 자세가 달라졌다”는 방문객의 말처럼, 일상 속 나들이가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이 된다.
성 안을 더 깊이 거닐다 보면, 남강 절벽 위에 올라앉은 촉석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려 시대에 창건돼 주장지휘소로 쓰였던 이 누각은 영남 제일의 누각으로 불릴 만큼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계단을 따라 올라서 누각 마루에 앉으면, 유유히 흐르는 강과 그 너머 진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의 촉석루는 화려함 대신 차분한 기운을 내뿜는다. 절벽 아래로 부딪혀 내려가는 강물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리고, 바람은 매섭기보다 묵직하게 몸을 스친다.
여행자들은 누각 기둥에 등을 기대고 말수가 줄어든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사진을 찍고, 풍경을 확인한 뒤에도 한참을 더 앉아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감각 때문일 것이다. 찬 공기 사이로 스며드는 나무 냄새와 물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생활 소음이 뒤섞이며 또 하나의 겨울 풍경을 만든다. 강을 건너는 햇빛의 각도에 따라 도시와 강, 성곽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도 눈길을 끈다.
성 안에서 옛 시간을 느꼈다면, 이제는 현재의 진주로 발걸음을 옮길 차례다. 호탄동에 자리한 로스팅웨어는 그런 전환을 위해 들르기 좋은 장소다. (주)웨이닝코리아의 플래그십 매장인 이 카페는 ‘커피를 파는 곳’을 넘어, 사람과 공간이 함께 경험을 만들어가는 곳을 지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따뜻한 조명과 은은한 원목 톤 인테리어가 바깥의 겨울 풍경과 또 다른 온도를 만들어 낸다. 성곽의 단단한 돌과는 정반대의, 부드럽고 정돈된 공기다.
공간 한가운데 자리한 로스팅 장비와 신선한 원두 향은 이곳을 단번에 ‘커피의 집’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산미가 살아 있는 원두부터 깊고 묵직한 향을 품은 블렌드까지, 취향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는 커피들은 오랜 시간 축적된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여행자들은 “몸이 먼저 따뜻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 걸었던 길을 돌아보게 된다”고 표현한다. 작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사진을 정리하거나, 동행자와 나란히 앉아 방금 다녀온 진주성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자연스럽다.
커피와 함께 곁들이는 디저트 역시 이곳의 시간을 풍요롭게 만든다. 과하지 않은 단맛과 담백한 식감이 어우러진 메뉴들을 한입 베어 물면, 차가운 바람을 맞던 몸과 손끝이 서서히 녹는 느낌이 든다. 겨울 여행에서 카페는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걸어온 동선을 되짚고 다음 목적지를 계획하는 작은 작업실이 되곤 한다. 로스팅웨어의 아늑한 분위기가 그런 과정을 부드럽게 받아준다.
진주 여행의 마지막을 채워줄 장소로는 평안동의 수복빵집이 자주 언급된다. 진주시민들의 오랜 일상을 함께해 온 이 전통 빵집에서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따뜻한 김과 고소한 밀가루 냄새, 달큰한 단팥 향이 한꺼번에 반긴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설명할 것 없는 곳’이지만, 여행자에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추억 장소가 된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모양의 찐빵이다. 막 쪄낸 찐빵을 손에 들면 뜨거운 김이 손바닥을 간질이고, 하얀 겉면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게 손가락 자국을 남긴다. 한입 베어 물면 촘촘하게 채워진 단팥이 퍼지는데, 달콤하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 입안에 오래 머문다. “딱 한 개만 먹자고 했는데, 어느새 봉지가 비어 있었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다. 특히 겨울철, 강변을 걷고 돌아오는 길에 집어 드는 찐빵 한 개는 그날의 여행을 포근하게 마무리해 준다.
커뮤니티에는 “진주성-촉석루-카페-빵집”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추천하는 글들이 자주 올라온다. 누구나 따라 하기 쉬운 짧은 코스지만, 성곽에서 역사를 떠올리고, 누각에서 강을 바라보고, 카페에서 오늘의 감정을 정리하고, 빵집에서 손난로 같은 간식을 쥐고 돌아오는 과정이 하나의 작은 의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댓글에는 “겨울에 가야 더 예쁜 도시”, “바람이 차가울수록 풍경이 또렷해진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여행이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하루의 리듬을 살짝 바꾸는 선택이 돼가고 있다. 남강을 따라 걷고, 오래된 성곽 위에 잠시 서 있고, 따뜻한 커피와 찐빵으로 몸을 데우는 일련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진주의 겨울 방식이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겨울의 진주를 찾는 일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잠시 다른 풍경 속에 놓아보는 일에 가깝다. 지금 이 변화는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본 ‘조용한 나만의 여행’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