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와 동굴의 숨결”…겨울 강원의 고요한 풍경이 위로가 될 때
요즘 한겨울의 강원으로 떠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눈 덮인 스키장이나 차가운 바다만 떠올렸지만, 지금은 동굴과 고택, 잔잔한 파도를 따라 걷는 사색의 여정이 일상이 됐다. 차가운 공기와 고요한 풍경이 오히려 마음을 느리게 만드는 계절이다.
겨울 강원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곳 중 하나가 삼척의 환선굴이다. 강원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자리한 환선굴은 총길이 약 6.5km에 이르는 거대한 동굴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계절이 바뀐 듯한 착각을 준다. 바깥 공기는 매섭게 차갑지만 동굴 안은 서늘한 습기가 감돌며 묵직한 숨결을 내뿜는다. 높게 치솟은 석주와 끊임없이 흐르는 동굴류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방문객들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늦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만큼 학술적 가치도 높아, 아이와 함께 찾는 가족 여행객에게는 자연 수업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잘 정비된 탐방로를 따라 한 걸음씩 이동하다 보면, 손전등 하나 없이도 은은한 조명 속에서 다른 세계를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강릉으로 내려가면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러워진다. 강릉시 견소동에 자리한 안목해변은 겨울 바다의 운치를 조용히 즐기려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긴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푸른 파도, 선명한 수평선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화려하진 않지만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바닷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잔잔한 파도 소리는 도시에서 쌓인 생각들을 하나씩 밀어내는 듯하다. 해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걷다 보면 무심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게 되고, 그 대신 바다 위로 반짝이는 겨울 햇살을 바라보게 된다. 해안 카페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도 인기다. 그만큼 ‘멍하니 바다를 보는 여행’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조용한 사색이 필요하다면 고택을 찾는 여정도 겨울에 어울린다. 강릉시 죽헌동의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으로, 한국인의 지폐 속 인물을 직접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검은 대나무가 둘러싼 고택에 들어서면 바람 소리마저 단정하게 들리는 듯하다. 보물로 지정된 건물에는 조선 중종 시대의 건축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청과 온돌방의 구조, 주심포에서 익공집으로 변해가는 건축 특징을 눈에 담는 관광객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경외가 함께 묻어난다. 마당을 천천히 거닐며 선현들이 오가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짧은 여행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일어난다. 겨울의 찬 공기 속에서도 고택이 가진 묵직한 기운이 몸을 감싸는 느낌이라는 반응도 많다.
바다를 좀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다면 속초로 방향을 돌려 영금정을 찾게 된다. 속초시 동명동 해안에 위치한 영금정은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거문고를 켜는 소리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바다 위로 뻗어 나간 다리를 따라 정자로 향하면, 눈앞에는 동해의 수평선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 번에 펼쳐진다. 겨울 바다는 유난히 색감이 짙어, 파도의 흰 포말과 옅은 안개, 멀리 머무는 어선의 불빛까지 하나하나 시선이 머문다. 해 질 녘이 되면 하늘과 바다가 붉은빛으로 물들고, 정자 위에 서 있는 여행자들은 말없이 그 풍경을 바라본다. 영금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길로, 사진을 찍기보다 풍경을 있는 그대로 눈에 담겠다는 이들이 많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 드러나지 않아도, 여행 취향의 흐름에서 분명하게 읽힌다. 스키장이나 쇼핑 중심의 여행 대신, 동굴과 고택, 조용한 해변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SNS에는 화려한 액티비티보다 동굴 내부의 어둑한 풍경, 고택의 대청마루, 노을 진 바다를 담은 사진이 더 많이 공유된다. 그만큼 “천천히 걷고 싶다”, “조용히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행 심리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을 ‘쉼의 재발견’이라고 표현한다. 계절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잠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특히 겨울 강원에서 찾는 것은 자극이 아니라 고요함이라는 해석이다. 자연의 리듬이 느려지는 시기에 맞춰, 사람들의 마음도 속도를 줄이는 셈이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걷고, 서늘한 동굴을 거닐고, 오래된 고택에 서서 숨을 고르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치유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겨울 강원은 춥다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차가움 덕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사람 붐비는 곳보다 동굴과 해변이 훨씬 편했다”는 후기들이 이어진다. 가족과 함께 찾은 이들은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이야기하고, 혼자 떠난 여행자들은 “누가 나를 부르지 않는 곳에서,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그 경험이 거창하지 않아도, 일상으로 돌아온 뒤 오래 남는 기억이 된다고 말한다.
결국 겨울 강원 여행의 매력은 화려한 볼거리보다 ‘천천히 머무를 수 있는 장소’에 있다. 환선굴의 신비로운 동굴 속 풍경, 안목해변의 잔잔한 파도, 오죽헌의 고즈넉한 마당, 영금정 위에서 맞는 겨울 노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풍경이다. 작고 사소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런 공간을 찾아 나서는 순간 우리 삶의 속도와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금의 겨울 강원은 거창한 도피가 아니라, 내 마음의 온도를 살펴보는 조용한 여행지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