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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신약개발 가속…한국바이오협회, 규제·데이터 전략 없인 격차 심화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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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을 활용한 신약개발이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면서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중국은 규제체계와 산업 전략을 패키지로 내놓으며 속도를 끌어올리는 반면, 국내는 투자 규모와 연구 성과의 질에서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AI가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 설계, 허가 심사까지 신약개발 전주기를 재편하는 만큼, 지금 시점의 정책 방향이 향후 10년 K바이오 경쟁력을 좌우할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한국바이오협회는 16일 AI기반 신약개발 산업화 전략 정책보고서를 내고 국내 AI 신약개발 생태계를 진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마켓츠앤마켓츠는 AI 활용 신약개발 시장이 2023년 18억6000만 달러 규모에서 연평균 29.9퍼센트씩 성장해 2029년 68억90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제약사는 AI를 활용해 후보물질 탐색, 독성 예측, 임상 성공 가능성 예측 등에서 개발 기간과 비용을 줄이며 경쟁력을 확보하는 흐름으로 분석된다.

보고서는 AI를 포함한 의료기술 투자 확대, 환자 맞춤형 의약품 수요 증가, 신약개발 비용과 시간 절감 요구, 희귀질환 연구 수요 확대를 주요 동력으로 꼽았다. 특히 후보물질 탐색 단계에서 방대한 화합물과 단백질 구조를 AI로 시뮬레이션하면 전통적인 실험 기반 방식보다 탐색 속도를 대폭 단축할 수 있고, 임상 단계에서도 실패 확률을 줄여 전체 개발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후보물질 발굴에만 수년이 걸리던 기존 패턴을 바꿔, 동일 자본으로 더 많은 파이프라인을 검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는 평가다.

 

각국 규제기관도 AI 도입 속도에 맞춰 허가·심사 체계 개편에 들어갔다. 미국에서는 식품의약국을 중심으로 AI 기반 의약품 심사·평가 파일럿 프로그램과 관련 지침이 마련됐다. 지난해에는 FDA 산하 약물평가연구센터 내에 AI 위원회가 신설돼 의약품 개발과 심사 전반에서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유럽은 세계 최초로 포괄적 AI 법안을 도입한 데 이어, 유럽 의약품청이 의료제품 규제에 AI를 적용하는 방향을 담은 페이퍼를 발표하며 규범 정비에 나섰다.

 

중국은 제약산업 디지털 전환 추진계획 2025에서 2030 기간을 설정하고 AI 신약개발을 국가 차원의 우선순위로 못 박았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 주요 도시 차원에서도 AI 기반 의약품 연구와 임상·허가 절차 연계에 관한 정책이 연이어 공개됐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AI를 전제로 한 신약개발 경쟁이 본격화된 상황으로, 규제와 산업정책을 동시에 설계하는 국가가 우위를 선점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보고서는 국내 상황에 대해 정책 발표는 이어지고 있지만 AI 신약개발 분야의 연구 경쟁력은 글로벌 대비 양과 질 모두에서 미흡하며, 실질적인 경쟁력은 아직 확보되지 못한 단계라고 평가했다. 특히 논문과 특허, 사업화 사례 모두 해외 주요국과 격차가 뚜렷해지는 추세로 분석했다. 지난해 발표된 새정부 경제성장전략에서 AI 대전환·초혁신경제 30대 선도 프로젝트에 K바이오·의약품이 포함되며 방향성은 제시됐지만, 합성생물학 등 핵심 바이오기술 수준이 선진국 대비 70퍼센트에서 80퍼센트 수준에 머무른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연구 성과 측면에서 양적 지표는 중국 추격이 두드러진다. 보고서에 따르면 AI 신약개발 관련 논문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지만, 2023년부터는 중국이 논문 수 기준에서 미국을 추월했다. 한국은 6위 수준으로 집계됐다. 질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RCR, 상대피인용지수 지표에서는 캐나다와 영국이 상위권을 차지했고, 한국은 최근 3년 평균 기준 5위 수준에 올라 있다. 양적 위상에 비해 논문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선방하고 있지만, 상위권과 간격을 좁히려면 고임팩트 연구축이 더 필요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허에서는 구조적 취약점이 도드라진다. 데이터 프로세싱, 단백질 구조예측, 약물효과 예측 등 알고리즘 핵심 영역에서 한국은 출원 건수 기준으로 평균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 사례는 아직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국내 출원에 집중된 구조 탓에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권리화 전략이 미흡하고, 국제 특허 분쟁이나 라이선스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기 어렵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보고서는 한국이 기술·데이터·규제 연계 전략을 서둘러 보완하지 않으면 글로벌 플랫폼과 빅파마에 종속될 위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산업화 전략 측면에서 보고서는 AI 신약개발 데이터 활용과 신뢰성 평가를 위한 표준화된 기준과 가이드라인 정립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신약개발에서 AI의 정확도를 검증하려면 대규모 임상 데이터와 유전체 정보, 실제 진료 데이터가 필요하지만, 국내에서는 가명정보 활용 제약과 기관 간 데이터 결합 한계로 인해 학습데이터 구축에 어려움이 반복되고 있다. 데이터 품질과 접근성을 공인된 규범으로 손보고, 규제기관이 수용할 수 있는 신뢰성 평가 체계를 만드는 것이 상용화의 관건으로 꼽힌다.

 

데이터 안심구역 제도의 실효성 제고도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정부가 지정한 데이터 안심구역 내에서는 민감한 의료·유전체 데이터를 보안 환경에서 결합·분석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지만, 접근 요건과 활용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보고서는 규제 샌드박스 확대를 통해 안심구역에서 보다 자유롭게 데이터 결합·모델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성과가 검증된 사례는 제도권 규정으로 편입하는 방식의 단계적 완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연구개발과 사업화를 분절적으로 지원하는 현재 구조도 개선 과제로 지목됐다. 보고서는 기초·원천 연구부터 후보물질 발굴, 전임상, 임상, 허가, 생산·마케팅에 이르는 전주기를 하나의 트랙으로 지원하는 중장기 연계형 정책 신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AI 신약개발은 클라우드 인프라, 고성능 컴퓨팅, 데이터 거버넌스, 규제 전문인력 등이 동시에 요구되는 복합 사업인 만큼, 개별 과제 지원 중심 정책만으로는 글로벌 플랫폼형 기업을 키우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 인력 부족 문제도 병목 요인으로 꼽혔다. 보고서는 바이오-AI 융합 전문가 양성을 위해 약학·의학·생명과학 교육과정에 데이터사이언스와 머신러닝 교육을 심화하고, 반대로 컴퓨터공학 전공자에게는 약리학과 임상통계 교육을 제공하는 이중 역량 프로그램 도입을 제안했다. 국내가 강점을 가진 특정 질환군이나 기술영역을 선별해 AI 바이오 분야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세우고, 집중 투자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 필요성도 언급했다.

 

거버넌스 측면에서는 AI 신약개발 전주기를 아우르는 통합 조정체계가 요구된다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현재는 과학기술, 산업, 보건의료, 데이터 규제를 담당하는 부처가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정책과 규제 환경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잇따라 왔다. 전담 조직을 통해 기술개발, 데이터 활용, 임상·허가, 보험·시장 진입까지 단일 관점에서 조율하는 구조가 갖춰질 경우, 기업의 전략 수립과 투자 집행도 한층 수월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바이오협회는 AI가 더 이상 신약개발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을 결정짓는 인프라라고 강조했다. 협회는 국내 AI 신약개발 산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정확히 진단하고, 기술과 데이터, 규제와 인력 양성을 묶어 설계한 산업화 전략을 정부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산업계는 한국이 지금의 격차를 줄여 글로벌 경쟁에 합류할 수 있을지, 아니면 데이터와 플랫폼에서 뒤처진 채 주변부에 머물지 주시하고 있다.

신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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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바이오협회#ai신약개발#데이터안심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