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거래 193조원…10대 그룹, 비상장사·상표권 거래로 지배력 강화
공시대상기업집단 내부거래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한 가운데, 10대 그룹과 비상장사, 그리고 총수 일가 지분이 높은 회사들을 중심으로 내부거래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지배구조 재편과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계열사 간 거래와 상표권 수익이 핵심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대기업집단 규제와 공정거래 감시 체계에 어떤 변화가 뒤따를지 주목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3일 올해 지정된 공시대상기업집단 92개를 대상으로 지난해 국내 계열사 간 내부거래 현황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들 집단의 지난해 내부거래 금액은 총 281조원, 내부거래 비중은 12.3%로 집계됐다. 내부거래 비중은 전년보다 0.5%포인트 낮아졌지만, 금액 기준으로는 약 3조3천억원 늘어 최근 10년 동안 12% 안팎 수준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수가 있는 상위 10개 공시집단의 지난해 내부거래 금액 합계는 약 193조원으로 공시집단 전체 내부거래 금액 281조원의 68.7%를 차지했다. 공정위는 이들 10대 집단의 내부거래 금액이 전년보다 1조원 증가해 2년 만에 다시 늘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7%포인트 하락했다. 상위 10대 집단 전체 거래액 가운데 내부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13.7%로, 공시집단 평균 12.3%보다 1.4%포인트 높았으며 최근 10년간 평균 대비 1~1.5%포인트 높은 수준이 지속된 것으로 나타났다.
공정위가 제시한 상위 10대 집단은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롯데, 한화, HD현대, GS, 신세계, 한진 등이다. 공정위는 최근 10년간 내부거래 비중 추이를 분석한 결과 HD현대와 한화의 증가가 두드러졌다고 평가했다. HD현대의 내부거래 비중은 같은 기간 7.0%포인트 상승했고, 한화는 4.6%포인트 늘었다. 반면 LG는 7.3%포인트, 롯데는 2.4%포인트 각각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공정위는 HD현대의 경우 핵심 사업 부문을 분할해 계열사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는 전략을 추진하면서 계열사 간 거래가 확대된 것으로 분석했다. 한화는 신규 계열사 인수와 사업구조 개편 과정에서 자회사를 분할하는 등의 움직임이 내부거래 확대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그룹 내 사업 재편과 지배력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비상장사 중심의 내부거래 확대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공정위에 따르면 비상장사의 내부거래 비중은 2024년 기준 21.7%로 2020년 18.7%에서 2.7%포인트 상승했다. 지난해 기준으로는 상장사 내부거래 비중 7.4%의 약 3배 수준이다. 공정위는 최근 5년 추세를 볼 때 비상장사에서 내부거래 비율이 뚜렷하게 상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규제와 정보공개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비상장 계열사를 중심으로 내부거래가 집중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집단별 내부거래 비중을 보면 대방건설이 32.9%로 가장 높았고, 중앙 28.3%, 포스코 27.5%, BS 25.9%, 쿠팡 25.8% 순으로 뒤를 이었다. 특히 쿠팡의 내부거래 비중은 1년 새 3.6%포인트 상승해 92개 집단 가운데 반도홀딩스(7.1%포인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상승 폭을 기록했다. 공정위는 쿠팡이 물류·IT·서비스 등에서 수직적인 계열사 구조를 갖춘 만큼 그룹 내부에서 물류와 시스템 통합, 각종 서비스 계약을 소화하면서 내부거래 비중이 높게 나타난 것으로 추정했다. 온라인 플랫폼과 물류 중심의 대형 유통기업이 계열사 구조를 통해 비용과 수익을 재배분하는 사례가 확대되는 흐름도 확인된 셈이다.
총수가 있는 집단 중 유가증권 상장 계열사 간 내부거래 금액이 큰 곳으로는 삼성이 75조8천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미래에셋 26조3천억원, SK 19조9천억원, 교보생명보험 16조3천억원, 한화 13조6천억원 순으로 나타났다. 금융·보험과 제조·서비스를 아우르는 대형 그룹을 중심으로 상장 계열사 간 거래가 활발하다는 의미다.
지배주주와의 이해상충 우려가 제기돼 온 상표권 사용료 거래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계열사 간 상표권 사용계약을 체결해 대가를 지급하는 유상 사용 집단 수는 5년 연속 증가했다. 상표권 유상거래를 하는 공시집단은 지난해 72개로 2020년보다 26개 늘었으며, 상표권 거래 수입은 2조1천529억원으로 5년 전보다 약 60% 증가했다.
연간 1천억원 이상 상표권 사용료를 받는 집단은 LG, 에스케이, 한화, 씨제이, 포스코, 롯데, GS 등 7개로, 이들 집단의 상표권 거래금액은 1조3천433억원에 달해 공시집단 전체 상표권 거래액의 62.4%를 차지했다. 공정위는 총수가 있는 65개 집단의 상표권 유상 거래 비율이 80.2%로, 총수가 없는 7개 집단의 63.6%보다 높다고 설명했다. 특히 총수 일가 지분이 20% 이상인 회사가 소속 집단 상표권 이용료의 81.8%를 받는 것으로 조사돼 상표권 거래가 총수 일가와 밀접하게 연결된 내부거래 형태임을 시사한다고 진단했다. 공정위는 상표권 거래가 총수 일가의 중요한 수익원으로 기능하는 양상이 확인된다며 상표권 거래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 필요성을 강조했다.
총수 일가 지분율과 내부거래 비중 간 상관관계도 뚜렷했다. 공정위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총수 일가 지분율이 20% 이상인 회사의 내부거래 비중은 10.9%였고, 지분율 30% 이상인 회사는 14.5%, 50% 이상은 18.3%, 총수 일가 지분율이 100%인 회사는 24.6%에 달했다. 공정위는 최근 5년간 경향을 보면 총수 일가 지분이 높을수록 소속 회사의 내부거래 비중이 커지는 경향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총수 2세 지분이 높은 집단에서는 내부거래 확대가 특히 두드러졌다. 음잔디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관리과장은 총수 2세 지분율이 50%를 넘는 집단에서 2022년을 기점으로 내부거래 비중이 뚜렷하게 높아졌다고 설명하며, 이 같은 흐름이 경영권 승계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승계 과정에서 지분이 높은 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기업가치를 키우고 배당·자본이득을 극대화하는 구조가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업종별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시스템 통합 및 관리업, 이른바 SI 업종에서 내부거래 비중이 특히 높게 나타났다.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해 SI 업종 내부거래 비중은 60.6%로 집계됐다. 최근 5년 동안 SI 업종 내부거래 비중은 60~63% 범위에서 형성되며 업종별 내부거래 비중 순위 1~2위를 지속해 왔다. 공정위는 SI 업종 가운데 내부거래 비중이 높은 집단으로 OK금융그룹, 네이버, 유진, 세아, 애경 등을 제시했다. 특히 OK금융그룹과 네이버의 경우 SI 분야 거래가 100% 내부거래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룹 내부 IT 시스템 구축과 운영을 전담 계열사가 사실상 독점하면서 수익을 내부에서 순환시키는 구조가 공고해진 셈이다.
금액 기준으로는 자동차·트레일러 제조업의 내부거래가 43조8천억원으로 가장 두드러졌다. 완성차와 부품, 물류와 금융 등으로 세분된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계열사 간 거래가 촘촘하게 이뤄지고 있는 영향으로 풀이된다. 제조업 특성상 장기 공급계약과 대규모 설비투자를 계열사 네트워크에서 처리하는 관행도 내부거래 금액 확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공정위 분석이 대기업집단 내부거래 구조가 단기간에 줄어들지 않고, 비상장사와 상표권, IT·자동차 등 특정 업종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특히 총수 2세의 지분이 높은 회사와 상표권 보유 계열사를 경영권 승계의 핵심 고리로 활용하는 흐름에 대해 공정 규제 강화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당국은 내부거래 감시와 상표권 거래 점검을 지속하는 한편, 지배구조 개선과 정보 공시 확대를 통해 시장 감시 기능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향후 정책 방향은 대기업집단 지배구조 개편과 공정거래법 집행 강도, 그리고 투자·고용 등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 분석 결과에 좌우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