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제약바이오 인재도 바꾼다…데이터역량 필수로
AI 기술 확산이 제약바이오 산업의 인력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후보물질 탐색과 임상 설계, 마케팅 전략 수립에 이르는 전 과정에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이 스며들면서, 실험실 중심 인력에서 디지털 툴과 분석 역량을 겸비한 융합형 인재 수요가 급격히 커지는 흐름이다. 글로벌 빅파마에서 시작된 인력 구조 재편은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모습이라 업계 전반의 직무 설계와 교육 체계 변화가 예상된다.
17일 글로벌 헤드헌팅 기업 스카우트파트너스에 따르면 최근 제약바이오 업계 채용시장에서는 생명과학, 의약, 화학 등 전통적 전공 지식뿐 아니라 데이터 분석과 AI 이해도를 함께 요구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과거에는 실험 설계와 논문 기반 리서치 역량이 평가의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연구 효율을 높이고, 데이터에서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능력이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영역은 연구개발이다. 신약 후보 물질 스크리닝, 구조 기반 활성 예측, 독성 및 약동학 데이터 해석에 머신러닝과 통계 모델이 활용되면서, 실험실 기반 경험과 함께 파이썬을 이용한 데이터 처리, 시각화, 기본적인 모델링 역량을 가진 연구자가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이미 계산생물학, AI 신약 발굴, 생물정보학 등 데이터 중심 직무 비중을 꾸준히 높여왔고, 국내 기업들도 유사한 직무를 도입하며 조직 재편에 나서는 추세다. 특히 이들 직무에서는 단백질 구조 데이터, 유전체 정보, 화합물 라이브러리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임상개발 영역에서도 디지털 역량이 점차 필수 요건에 가까워지고 있다. 환자 모집 전략 수립 과정에 전자의무기록과 보험청구 데이터 등 실사용데이터를 활용하고, 모니터링 단계에서는 원격 측정 장치와 모바일 앱에서 수집되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상 신호를 탐지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분산형 임상시험 도입이 늘면서, 디지털 플랫폼 운영 이해도와 원격 모니터링 툴 사용 경험을 갖춘 디지털 임상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임상 통계와 프로그래밍을 겸한 인재라면 프로토콜 설계부터 데이터 관리, 규제 보고까지 전 단계를 아우를 수 있다는 점에서 채용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분석이다.
마케팅과 영업 조직에서도 데이터 활용 비중은 꾸준히 확대되는 방향이다. 스카우트파트너스는 대면 영업과 관계 구축이 여전히 핵심이지만,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세분화 전략, 디지털 채널별 성과 분석, 온라인 콘텐츠 운영 능력이 점차 우대 요소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 규모 추정과 경쟁 구도 분석에 더해 보험급여 정보, 처방 패턴, 의료기관 특성 데이터 등을 결합해 전략을 수립하는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스프레드시트 활용을 넘어 데이터베이스와 시각화 도구를 다룰 수 있는 인재가 선호된다는 평가다.
글로벌 기업은 이미 관련 직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로슈와 제넌텍은 RWD 분석 전문가, AI와 머신러닝 엔지니어 등 데이터 중심 직무를 대거 신설해 통계, 역학, 컴퓨터공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채용 요건에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임상시험 결과뿐 아니라 실제 진료 현장에서 나오는 대규모 데이터를 분석해, 약물 사용 패턴과 안전성, 비용 대비 효과를 정교하게 평가하는 역할을 맡는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RWD 기반 허가와 급여 심사가 늘어나고 있어, 이 같은 역량을 갖춘 인재의 전략적 가치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국내에서는 GC녹십자가 대표적인 변화 사례로 꼽힌다. 이 회사는 RWD와 RWE 기반 연구 전략 수립, AI 기반 의약품 개발 플랫폼 기획, 생물통계와 임상 데이터 관리를 결합한 임상 데이터 분석 등 디지털·데이터 역량을 전면에 내세운 채용요건을 공개했다. 또한 시장 조사와 분석 직무에서도 보험청구 데이터와 각종 의료 데이터 활용을 핵심 업무로 제시하며, 통계 분석 도구와 데이터 처리 경험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인재상을 재정의하고 있다. 이는 단순 보고용 자료 작성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업 전략 수립에 데이터를 반영하는 조직문화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규제와 정책 환경도 이 같은 인력 수요 변화와 맞물려 있다. 각국 규제기관은 RWD와 RWE를 허가와 안전성 평가에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이드라인을 정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데이터 품질 검증, 분석 방법론 적합성, 알고리즘 투명성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필요해지고 있다. 특히 AI를 활용한 후보물질 발굴이나 임상 설계 지원 도구가 증가하면서, 모델의 설명 가능성과 편향성 검증을 담당할 수 있는 인력에 대한 필요성도 커지는 양상이다.
스카우트파트너스 유영식 부사장은 제약바이오 기업의 직무가 점진적으로 디지털과 데이터 역량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며, 앞으로는 실험과 데이터 분석을 모두 이해하는 T자형 인재가 연구개발과 임상, 사업 전략의 핵심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산업계는 AI와 데이터 기술에 맞춰 직무 구조와 교육 체계를 얼마나 빠르게 바꿀 수 있을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융합형 인재가 제약바이오 경쟁력을 어떻게 끌어올릴지 주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