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재조합 탄저백신 국산화" GC녹십자, 첫 출하로 방역체계 강화
유전자 재조합 기반 탄저백신이 국내 방역 체계의 새로운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GC녹십자가 질병관리청과 공동 개발한 탄저백신 배리트락스주를 처음으로 출하하면서 국가 차원의 탄저 대비 비축 체계가 본격 가동됐다. 백신을 100퍼센트 국산 기술과 생산 인프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감염병 위기와 바이오 안보 논의의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C녹십자는 8일 배리트락스주가 국내에서 처음 출하됐다고 밝혔다. 이 제품은 4월 국산 제39호 신약으로 품목허가를 받은 이후 약 8개월 만에 시장에 공급되는 것으로, 초기 물량 전량이 질병관리청 국가 비축 백신으로 공급된다. 정부가 탄저균 감염 위험과 생물테러 위협에 대비해 전략 물자로 관리해 온 영역에 국산 신약이 본격 투입되는 셈이다.

배리트락스주는 세계 최초로 개발된 유전자 재조합 탄저백신으로 소개된다. 기존 일부 국가에서 활용되던 탄저백신이 비병원성 탄저균을 약독화해 사용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백신은 탄저 독소의 주요 구성요소인 방어 항원 단백질만을 선택적으로 발현하고 정제해 제조한다. 방어 항원은 탄저균이 인체 세포 안으로 독소를 주입할 때 관문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가리킨다. 이 항원을 표적으로 면역계가 항체를 형성하도록 설계해, 실제 병원체 대신 독소의 핵심 부위만 인식시키는 방식이다.
이 같은 유전자 재조합 플랫폼은 제조 과정에서 살아 있는 탄저균을 직접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생산 안전성을 끌어올린다. 독소 구성 단백질만을 분리해 사용하기 때문에 잔여 독성이나 불순물 관리 측면에서도 공정 제어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GC녹십자는 임상시험 단계에서 기존 탄저백신 대비 우수한 수준의 안전성과 강력한 면역원성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단백질 기반 재조합 백신 특성상 보호 항체 형성률과 지속 기간을 명확한 수치로 관리할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배리트락스주 생산은 GC녹십자의 전남 화순 백신공장이 담당한다. 화순공장은 연간 최대 1000만 도즈의 탄저백신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췄다. 1인당 4회 접종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250만 명에게 접종할 수 있는 규모다. 국가 비축 정책과 연계할 경우 단기간에 대량 공급이 필요한 탄저 테러 대응 시나리오에서 중요한 인프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회사는 공정 자동화와 배양 스케일업을 통해 필요 시 생산량을 신속히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을 상용화 경쟁력으로 제시했다.
유전자 재조합 탄저백신의 상용화는 백신 자급화 전략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탄저는 일반 감염병 유행보다는 군사적·테러적 사용 가능성 때문에 각국이 전략 물자로 분류하는 병원체다. 지금까지는 해외에서 개발된 백신과 원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공급망 교란이나 수출 규제 시 국가 안보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배리트락스주가 설계부터 생산까지 전 과정이 국내 기술로 이뤄진 만큼, 정부 입장에서는 안보 리스크를 줄이면서 장기 비축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난 셈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탄저백신 연구와 비축 경쟁이 오래전부터 진행돼 왔다. 미국은 자국 내 탄저 테러 사건 이후 탄저백신을 국가 전략비축물자로 지정해 예산을 지속 투입해 왔고, 여러 세대의 백신을 순차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번에 국내에서 출하된 배리트락스주와 유사한 유전자 재조합 개념의 제품도 미국에서 이미 정부 계약 형태로 공급되고 있다. 국내 기술이 이와 유사한 수준의 플랫폼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추후 수출 또는 국제 공동 비축 논의로 확장될 여지도 있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다만 탄저백신은 접종 대상이 전 국민이 아닌 특수 직군과 위기 상황에 제한되는 특성상, 상업 시장보다는 공공 조달과 안보 예산의 영향을 크게 받는 영역이다. 질병관리청과 국방부, 관계 부처가 수요 예측과 비축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국내 생산 설비의 가동률과 추가 투자 계획이 달라질 수 있다. 생물학무기금지협약과 같은 국제 규범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백신 개발과 비축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국내에서는 비상용 백신과 치료제의 규제 경로 역시 논의 대상이다. 탄저백신과 같이 생물테러 대비 목적의 제품은 실제 대규모 유행 사례가 드문 만큼, 전통적인 의미의 대조임상 설계가 어려운 편에 속한다. 이에 따라 각국 규제기관은 동물모델, 면역대리지표, 시뮬레이션 자료 등을 결합해 승인 여부를 판단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추세다. 국내 규제체계도 국제 기준에 맞춰 검증 모델을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국산 탄저백신 출하를 감염병 대응 체계 고도화의 일부로 해석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국가마다 mRNA, 단백질 재조합, 바이럴벡터 등 백신 플랫폼을 다각화하고, 위험 병원체에 대한 사전 비축 전략을 강화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탄저와 같은 고위험 병원체에 대응하는 백신 기술을 확보하면, 향후 다른 병원체로의 플랫폼 전환과 응용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술 파급력도 주목받고 있다.
허은철 GC녹십자 대표는 질병관리청과 공동 개발한 국산 탄저백신의 첫 출하가 국가 방역 역량 강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정부와 민간 기업 간의 전략적 파트너십이 고위험 감염병 대비 분야 전반으로 확대될지 주시하고 있다. 산업계는 유전자 재조합 탄저백신이 실제 위기 상황에서 검증을 거쳐 시장과 제도에 안착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백신 자급화 전략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에 관심을 모으는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