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핵 없는 한반도 추구”…이재명, 당대회 앞둔 북한에 완화된 메시지

권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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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의 균열이 깊어지는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과 북한 지도부 간 메시지 전쟁이 다시 불붙었다. 북한이 노동당 전원회의와 당 대회를 통해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시점에, 이 대통령이 표현 수위를 조정한 대북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정국이 미묘하게 요동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일 제22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출범회의에서 연설을 통해 “우리에게 놓인 시대적 과제는 새로운 남북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적대 해소, 평화 공존, 공동 성장을 남북 관계의 세 가지 핵심 키워드로 제시하며, 경색 국면의 전환 필요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그동안 대북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반복돼 온 ‘비핵화’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핵 없는 한반도를 추구하며 공고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표현상 ‘비핵화’ 대신 ‘핵 없는 한반도’를 사용한 셈이다.

 

이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국제사회의 엄청난 제재를 감수하며 핵무장을 시도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핵무장은 핵 없는 평화적 한반도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선을 그었다. 비핵화 원칙이 북한만의 의무가 아니라 남북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범이라는 점을 부각하며, 책임 분담을 전제로 한 대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정책 목표의 본질은 유지하되 표현을 바꾼 배경에는 북한의 강경한 입장이 자리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한국 정부가 제시한 ‘중단, 축소, 비핵화’ 3단계 비핵화론을 겨냥해 “우리의 무장해제를 꿈꾸던 전임자들의 숙제장에서 옮겨 베껴온 복사판”이라고 맹비난했다. 이후 북한은 ‘비핵화’라는 용어 자체를 남측의 일방적 요구로 간주하며 거부감을 드러내 왔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표현 전환을 두고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기술적으로 비핵화라는 용어를 피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임을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비핵화를 뒷전으로 밀어냈다는 비판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이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통일부는 현재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을 정리해 연내 발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정책 문서와 공식 입장에도 ‘비핵화’ 대신 ‘핵 없는 한반도’라는 표현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정치권과 학계에서 동시에 나오고 있다. 문구만 바뀐 것인지, 대북 접근 방식의 재조정인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뒤따른다.

 

진보·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비핵화’는 대북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자리해 왔다. 전문가들은 내용상 ‘비핵화’와 ‘핵 없는 한반도’ 간 차이는 크지 않다고 보면서도, 상징성이 급격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향후 “대통령이 비핵화를 후순위로 밀어낸 것 아니냐”는 공세가 제기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반면 진보 성향 전문가들은 북한의 거부감을 줄여 협상 테이블에 복귀시키려는 ‘입구 조정’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이 대통령의 메시지가 북한의 주요 정치 일정을 앞두고 제기됐다는 점도 정치적 의미를 키운다. 북한은 12월 중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올해 정책을 정리하고, 내년 초 제9차 당 대회를 열어 향후 5년간의 국정 방향을 확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 회의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국내 북한 전문가들은 이 일련의 정치 행사에서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당 규약과 헌법에 각각 반영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남북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임을 제도와 문서로 못박아 관계 단절을 제도화하려 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김정은 위원장은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우리는 명백히 우리와 한국이 국경을 사이에 둔 이질적이며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임을 국법으로 고착시킬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기류가 현실화될 경우 남북관계는 기존의 ‘잠정적 분단’에서 ‘확정된 두 국가 체제’로 인식이 급변할 수 있다. 이 경우 향후 한국 정부가 추진해 온 통일 담론과 교류 협력 정책 전반이 근본적인 수정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에 앞서 이 대통령이 직접 연설을 통해 완화된 표현을 동원하면서 북한에 ‘대화의 여지’를 남기려 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연말과 연초 정치 행사에서 대남·대미 메시지를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남북 모두가 향후 몇 달간 각자의 노선을 문서화하고 대외 메시지로 굳혀 나갈 가능성이 커지면서, 양측이 선택하는 용어 하나하나가 한반도 정세를 좌우하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는 향후 대북정책 로드맵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핵 없는 한반도’ 표현의 사용 범위와 의미를 둘러싼 국내 논란을 관리하는 동시에, 북한의 대응 수위를 주시하며 외교·안보 라인 간 조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국회 역시 차기 회기에서 관련 외교·안보 현안을 점검하며 여야 간 공방을 이어갈 전망이다.

권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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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김정은#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