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 비자에 체류자격까지 명시”…한국 대미투자기업 전용창구 공식 가동
한국 대미 투자기업의 비자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불안이 완화될 돌파구가 마련됐다. 조지아주 한국인 근로자 집단 구금 사태 이후 한미 간 비자 제도 개선을 요구해 온 정부와 기업의 목소리가 제도화 단계에 들어갔다.
외교부는 5일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이 주한미국대사관 내에 설치된 한국 투자기업 전담창구, 이른바 KIT 데스크를 방문해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와 한미 비자 워킹그룹 논의 결과와 향후 계획을 점검했다고 밝혔다. KIT 데스크는 한국의 대미 투자기업을 위한 전용 비자 창구로, 10월부터 시범 운영을 거쳐 이날 공식 출범했다.

KIT 데스크는 미국 국무부, 상무부, 국토안보부, 세관국경보호국 등 미국 정부 부처가 협업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주한미국대사관 내 별도 회의 공간과 전담 인력을 두고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한화 등 주요 대미 투자 대기업과 개별 면담을 진행하며, 이들 기업의 협력업체도 이용 대상에 포함된다.
핵심은 단기 상용 B-1 비자의 운용 방식 변화다. 주한미국대사관 설명에 따르면 KIT 데스크를 통해 발급되는 B-1 비자에는 주석란에 해당 한국인 근로자가 미국 규정에 따른 근로자라는 체류 자격과 함께 어느 기업의 어떤 공장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지 구체 정보가 명시된다. 외교부는 한국에만 적용되는 특별 조치라고 설명하면서 입국 심사 과정에서의 오해 가능성을 줄이고, 이민 단속 상황에서도 체류자격을 입증하는 데 실질적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
또한 대기업이 협력사를 포함한 전체 출장 인원에 대해 일괄적으로 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 절차도 새로 마련됐다. 그동안 대기업은 주로 E-2, L 등 비교적 안정적인 비자를 통해 인력을 파견해 왔지만, 협력사 직원들은 개별적으로 서류를 준비해야 했고 상대적으로 비자 발급·입국 거부 사례가 잦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정부는 KIT 데스크 운용으로 이런 애로가 상당 부분 완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보도자료를 통해 “KIT 데스크의 출범은 미국의 재산업화를 지원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며, 공동 번영을 증진하는 한국의 대미 투자를 적극 환영하고 장려하겠다는 주한미국대사관의 책무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자국 내 제조업 투자 확대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해석도 뒤따랐다.
이번 조치는 9월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근로자 집단 구금 사태가 직접 계기가 됐다. 당시 미국 현지 이민 집행 과정에서 한국인 기술 인력 다수가 구금되면서 대미 투자기업과 협력사들 사이에 비자·체류 자격 불안이 급속히 확산됐다. 정부는 이후 미국 측과 비자 워킹그룹을 가동해 대응 방안을 논의해 왔다.
미국 정부는 조지아주에서 구금됐던 근로자들이 다시 미국에 입국할 때 불이익이 없도록 보장했다. 기존에 B-1 비자를 소지한 경우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무비자 전자여행허가 제도인 ESTA로 입국하던 근로자에 대해서는 즉시 B-1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협조 중이라고 외교부는 전했다.
정부는 비자 제도 개선과 더불어 미국 현지 입국 단계에서의 혼선을 줄이기 위한 조치도 병행한다. 한국 기업 근로자가 많이 드나드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애틀랜타 등 주요 공항이 소재한 지역에서 현지 세관과의 상시 협력 채널을 구축해, 입국 심사 과정에서 한국 대미 투자기업 근로자에 대한 이해를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미국 정부는 B-1 비자와 ESTA를 통한 미국 내 허용 활동 범위를 정리한 설명자료를 국문과 영문으로 제작해 주한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앞서 한미 비자 워킹그룹 회의에서 미국 측은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 과정에서 수반되는 해외 구매 장비의 설치, 점검, 보수 활동을 위해 B-1 비자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과, ESTA 입국자도 B-1 비자 소지자와 동일한 범위의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재확인한 바 있다. 다만 구체적인 활동 범위와 관련해서는 추가 협의가 필요하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정부는 중장기적으로 한국인 전용 비자 신설도 계속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다만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 내 법 개정 문제는 행정부 관할을 넘어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정치적 사안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내년에도 워킹그룹을 지속 개최하기로 했고, 미국 의회를 대상으로도 외교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와 국회는 향후 한미 비자 협의를 통해 투자기업 인력의 안정적 체류를 제도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정국 차원에서도 대미 투자 확대와 연계된 고용·지역경제 효과가 쟁점이 되고 있는 만큼, 한미 비자 협상 결과가 경제 정책과 외교 현안 전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