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바이오마커 플랫폼 루닛 스코프”…루닛·다이이찌, 항암신약 전략 바꾼다
의료 인공지능 기술이 항암 신약개발 전 과정의 판도를 바꾸는 도구로 부상하고 있다. 국내 의료 AI 기업 루닛이 글로벌 항암 리더 다이이찌산쿄와 손잡고, 신약 후보 물질이 임상 단계에 진입하기 전부터 AI 기반 바이오마커를 설계하는 협력을 개시했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빅파마가 신약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AI를 전략의 핵심축으로 편입한 사례로 보고, 향후 항암제 개발 경쟁 구도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루닛은 16일 다이이찌산쿄와 항암제 신약개발 분야 협력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이번 계약에 따라 양사는 다이이찌산쿄가 개발 중인 2개 신규 항암제 파이프라인에 루닛의 AI 기반 바이오마커 플랫폼 루닛 스코프를 적용한다. 글로벌 제약사가 후보물질 단계의 항암 파이프라인에 AI를 정식 탑재해 바이오마커 탐색을 진행하는 구조가 구체화됐다는 점에서 업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기술 적용의 핵심은 루닛 스코프 내 두 모듈이다. 먼저 면역조직화학 정량분석기 루닛 스코프 uIHC가 다이이찌산쿄의 조직검사 데이터에 적용된다. 면역조직화학 검사는 특정 단백질 발현을 염색으로 확인하는 표준 병리 기법인데, 그동안 판독 결과가 병리의사 경험과 육안 판단에 크게 좌우된다는 한계가 있었다. 루닛의 AI는 병리 슬라이드 이미지를 픽셀 단위로 분석해 염색 강도와 발현 패턴을 계량화하고, 동일 환자군 내에서도 투약 반응 가능성이 높은 세부 아형을 더 정교하게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기존 수작업 기반 정성 분석 대비 재현성과 수치 정확도를 크게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축은 종양미세환경 분석을 담당하는 루닛 스코프 IO다. 종양미세환경은 암세포와 면역세포, 혈관, 기질 등이 뒤섞인 국소 환경을 의미하는데, 같은 암종이라도 미세환경에 따라 면역항암제 반응률이 크게 달라진다. 루닛 스코프 IO는 슬라이드 이미지에서 면역세포 분포와 공간적 패턴을 자동 분류해 면역표현형을 정의한다. 예를 들어 종양 내부까지 면역세포가 침윤한 이른바 염증형 종양과, 종양 주변에서만 면역세포가 관찰되는 배제형 종양 등을 체계적으로 구분해 약물 반응 예측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기존에는 대규모 임상 데이터에서 이런 공간 패턴을 정량화하기 어려웠으나, AI가 개입하면서 수천 장 단위 병리 이미지에서도 일관된 기준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차별점으로 평가된다.
양사는 두 기술을 기반으로 세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첫째, AI가 제안하는 신종 바이오마커를 발굴해 기존 단일 지표 기반 반응 예측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전략이다. 단백질 발현 정도나 특정 유전자 변이 유무에 더해, 종양미세환경 구조와 세포 간 상호작용 패턴까지 통합한 복합 바이오마커를 설계해 환자군을 세분화하는 접근이다. 둘째, 중개임상과 임상시험 설계를 고도화한다. 전임상과 초기 임상 단계에서 AI 분석 결과를 활용해 누구에게서 약효가 발현되는지, 어떤 병리적 특징이 이상반응과 연관되는지 조기에 탐지함으로써 개발 실패 위험을 줄인다는 구상이다. 셋째, 실제 임상시험 단계에서는 AI로 대상 환자군을 정밀하게 걸러내 등록함으로써, 임상 효율성과 통계적 검출력을 끌어올리겠다는 방침이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접근이 환자 수를 줄이면서도 유효성을 입증할 수 있는 설계를 가능하게 해, 기간과 비용 절감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이이찌산쿄는 항체약물접합체 ADC 엔허투를 통해 글로벌 항암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운 제약사다. 엔허투는 HER2 표적 고형암에서 다수의 적응증을 확보하며 블록버스터로 자리 잡았고, 이를 기반으로 차세대 항암 후보 파이프라인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루닛 AI를 신약개발 초기에 통합하는 이번 행보는, 단일 약물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포트폴리오 전반에 AI 기반 환자 선별 체계를 이식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글로벌 바이오 업계에서는 빅파마가 독자적인 AI 연구 조직을 키우는 동시에, 루닛과 같은 특화 플랫폼과의 파트너십을 병행하는 추세가 확산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국내외에서는 이미 AI와 제약의 융합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 루닛 역시 지난해 아스트라제네카와 체결한 협약을 통해 시판 중인 기존 항암제를 대상으로 AI 기반 환자 선별과 반응 예측을 진행하고 있다. 당시 협력은 이미 허가된 약을 중심으로 적응증 확대와 반응 예측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다이이찌산쿄와의 계약은 아직 시장에 나오지 않은 신약 후보 단계에서부터 AI를 설계 도구로 활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업계에서는 같은 AI 기술이라도 기존 약 리포지셔닝과 신약 후보 최적화에 적용될 경우 데이터 요구 수준과 규제 검토 범위가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규제 측면에서 보면 AI 바이오마커의 활용은 각국 의약품 허가당국의 검토 대상이 될 전망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특정 디지털 바이오마커를 임상시험 설계와 승인 심사에 반영하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고, 국내에서도 식품의약품안전당국이 디지털 기반 임상지표의 검증 기준을 정립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플랫폼 기업 입장에서는 알고리즘 성능뿐 아니라 학습 데이터 출처와 품질, 재현성 검증 프로토콜을 명확히 제시해야 하며, 제약사는 AI가 제시한 바이오마커를 임상 통계분석 계획에 어떤 방식으로 통합할지에 대한 규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서범석 루닛 대표는 아스트라제네카와의 협업이 시판 중 항암제를 대상으로 한 적용이었다면, 다이이찌산쿄와의 이번 계약은 개발 중인 신약에 AI를 처음부터 설계 요소로 탑재했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AI 바이오마커를 전제로 설계된 신약 개발이 본격화됐다고 평가하며, 글로벌 항암제 패러다임에서 AI의 위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루닛은 현재 글로벌 상위 20대 제약사 가운데 15곳과 루닛 스코프 도입을 협의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추가 계약이 현실화될 경우, 루닛은 항암제 임상 설계의 사실상 표준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여지도 거론된다.
산업계에서는 AI를 활용한 항암 신약개발이 실제 승인과 상용화 단계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기술의 고도화 못지않게 규제와 임상 관행, 병리 평가 체계가 함께 변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신약과 AI, 데이터와 제도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가 차세대 항암제 경쟁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