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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백혈병 발작, 뇌전증으로 진행"…장기 추적 필요성 커져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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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치료 과정에서 나타나는 발작이 일부 환자에게서는 만성 뇌전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국내 의료진의 국제 공동연구 결과가 나왔다. 항암제 투여 중 발생하는 신경독성과 뇌 백질 손상이 장기적인 뇌전증 위험 인자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량 분석되면서, 소아 혈액암 생존자의 정밀 모니터링과 장기 추적 관리 필요성이 한층 부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항암제 용량 조절, 영상기반 위험 분류, 유전체 분석을 결합한 정밀의료 전략이 소아 암 치료의 새로운 과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연구는 이대목동병원 소아청소년과 최선아 교수가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라디 어린이병원 뇌전증 센터의 쉬프테 새터 박사팀과 함께 수행했다. 연구팀은 소아 B세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 가운데 치료 과정에서 발작이 보고된 사례에 주목해, 발작 양상과 이후 뇌전증 진행 여부를 장기간 추적 관찰했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항암제 부작용, 전해질 불균형, 혈압 불안정, 감염 등으로 치료 중 급성 발작이 나타나기 쉬운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동안 이런 발작이 치료 종료 후까지 이어지는 만성 뇌전증으로 얼마나, 어떤 환자에서 진행하는지에 대한 체계적 데이터는 부족했다.  

연구팀은 2011년부터 2024년까지 약 14년간 B세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을 진단받은 소아 청소년 중 발작을 경험한 23명을 선별해 추적했다. 백혈병 진단 시 평균 연령은 6.1세였고, 첫 발작은 진단 후 평균 28개월이 지난 8.5세에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환자들은 항암 화학요법, 방사선 치료 등 표준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발작이 발생했으며, 연구팀은 발작 유형, 약물 사용 이력, 영상 검사 결과, 장기 예후를 종합 분석했다.  

 

23명 가운데 17명, 비율로 73.9퍼센트는 치료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유발성 발작으로 분류됐다. 여기서 유발성 발작은 특정 약물 독성이나 급성 대사 이상처럼 뚜렷한 원인이 있을 때 단기간 나타나는 발작을 뜻한다. 특히 항암제로 널리 사용되는 메토트렉세이트가 뇌에 독성을 일으켜 발생하는 메토트렉세이트 관련 신경독성이 주요 요인으로 지목됐다. 메토트렉세이트는 엽산 대사를 차단해 암세포 증식을 막는 약물로, 고용량 투여 시 뇌 백질 손상과 급성 신경학적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어 왔다.  

 

그러나 발작이 모두 일시적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연구 결과 23명 중 7명, 30.4퍼센트는 시간이 지나도 발작이 반복되는 만성 뇌전증으로 진행했다. 이 가운데 5명, 21.7퍼센트는 일반 항경련제에 잘 반응하지 않는 약물 난치성 뇌전증 단계에 이르렀다. 약물 난치성 뇌전증 환자 일부는 외과적 수술을 통해 발작 발생 부위를 제거하는 치료를 받았고, 다른 일부는 다발성 발작과 인지 장애를 동반하는 중증 뇌전증 증후군인 레녹스 가스토 증후군으로 진단됐다. 기존에 소아 백혈병 생존자에서 보고된 신경학적 후유증에 비해, 상당히 높은 비율의 난치성 뇌전증이 확인된 셈이다.  

 

연구팀은 특히 만성 뇌전증으로 진행한 환자에서 첫 발작 발생 연령이 유발성 발작 환자 군보다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치료 초기의 대사성 위기보다, 치료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 나타나는 발작이 장기적인 뇌 회로 변화와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뇌 자기공명영상 검사에서는 만성 뇌전증 환자 다수에게서 백질뇌병증 소견이 관찰됐다. 백질뇌병증은 뇌의 신경섬유를 둘러싼 수초와 백질 구조가 손상된 상태로, 메토트렉세이트 독성에 의해 후천적으로 유발될 수 있다.  

 

연구팀은 메토트렉세이트로 유도된 백질뇌병증이 모든 환자에서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점에 주목해, 유전적 취약성과의 연관 가능성을 제기했다. 항암제 대사 효소, 신경 보호 기전과 관련된 유전자 변이가 존재하는 환자의 경우 같은 용량의 약물에도 뇌 백질 손상이 심화되고, 장기적으로 뇌전증 회로 형성이 촉진될 수 있다는 가설이다. 아직 개별 유전자 수준의 분석은 초기 단계지만, 향후 유전체 기반 정밀의료를 통해 뇌전증 고위험 소아 백혈병 환자를 선별하는 연구가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결과는 소아 백혈병 치료에서 생존율뿐 아니라 뇌 기능의 질적 보존이 핵심 목표로 떠오르고 있음을 다시 보여준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소아암 중 가장 흔한 유형이지만, 항암제 조합과 용량 조절이 표준화되면서 선진국 기준 5년 생존율이 90퍼센트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존자 규모가 늘어나는 만큼, 기억력 저하, 학습 장애, 주의력 문제, 감정 조절 곤란과 같은 신경인지 후유증 관리가 의료 현장의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발작과 뇌전증은 이런 후유증 가운데에서도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에 직접적 충격을 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최선아 이대목동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소아 백혈병 환자 관리 전략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아 백혈병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발작 대부분은 치료 환경을 개선하면 회복될 수 있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지만, 일부에서는 발작이 수년간 지속되는 만성 뇌전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발작이 백혈병 진단 후 비교적 늦은 시점에 처음 발생하거나, 뇌 MRI에서 백질뇌병증이 확인된 경우에는 치료가 종료된 이후에도 정기적인 신경학적 진찰과 뇌파 검사, 인지 기능 평가를 포함한 장기 추적 관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는 뇌전증 분야 국제 학술지인 뇌전증 리서치 12월호에 B세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소아 청소년의 뇌전증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국제학술지에 실렸다는 점은 연구 결과가 해외 의료진과 연구자들에게도 공유돼, 항암제 독성 관리와 뇌전증 예방 전략 논의로 이어질 여지를 넓힌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소아 암 생존자 코호트를 장기 추적해 심혈관, 내분비, 신경계 후유증을 분석하는 연구가 활발하며, 이번 결과가 그 흐름 속에서 신경독성 관리 기준을 구체화하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향후 연구 과제는 메토트렉세이트 투여 용량과 일정, 동시 사용되는 다른 항암제, 방사선 치료 여부, 각 환자의 유전적 배경을 통합해 뇌전증 발생 위험을 정량화하는 것이다. 또한 치료 중 뇌 MRI와 뇌파를 표준화된 시점에 반복 측정해 백질 변화와 전기생리학적 이상이 어느 단계에서 뇌전증 회로 형성으로 이어지는지 규명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국내 의료계에서는 이번 결과가 소아 백혈병 치료 프로토콜 개편과 국가 차원의 암 생존자 관리 정책 논의에 참고 자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소아 암 생존자를 대상으로 한 정규 신경발달 검진, 학습 지원, 정신건강 서비스가 혈액 종양 전문 진료와 긴밀히 연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산업계에서는 항암제에 의한 신경독성을 줄이는 보호 기전 약물이나, 조기 영상 분석을 통해 고위험군을 가려내는 인공지능 영상 판독 솔루션 등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 수요가 확대될 여지도 있다. 의료 현장과 연구·산업계는 소아 암 생존율 향상을 넘어, 생존 이후 삶의 질을 지키는 것이 차세대 치료 기술 경쟁의 핵심 과제가 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배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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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아이대목동병원#급성림프구성백혈병#뇌전증리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