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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리스크 줄이자”…삼성바이오, 美공장 인수로 CDMO 재편 주도

한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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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의약품을 위탁개발생산하는 CDMO 산업에서 미국 현지 생산기지가 새로운 승부처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정부의 관세 정책과 중국 생물보안법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는 가운데,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잇달아 미국 공장을 직접 인수하며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 업계는 이런 현지화 전략이 향후 트럼프 행정부 재집권 가능성까지 감안한 ‘관세 회피이자 수주 경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2일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의 미국 바이오의약품 생산시설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인수 대상은 미국 메릴랜드주 락빌에 위치한 휴먼지놈사이언스 바이오의약품 생산시설로, 회사는 이를 통해 미국 내 첫 생산 거점을 확보하게 됐다. 인수 주체는 미국 자회사 삼성바이오로직스 아메리카이며, 거래 규모는 2억8000만 달러, 약 4136억원 수준이다. 인수 절차는 2025년 1분기 내 마무리하는 일정이 제시됐다.

해당 공장은 항체의약품 등 바이오의약품 생산을 위한 발효탱크와 정제설비를 갖춘 상업용 생산라인으로 알려졌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인수 후 기존 글로벌 제약사들과 진행 중인 위탁생산 계약 일부를 미국 공장으로 옮기고, 북미 고객사 대상 신규 수주도 이곳에서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이번 인수는 공급 기지 다변화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에 집중됐던 생산 구조를 미국까지 확장하는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관계자는 “이번 인수로 미국 의약품 관세 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됐다”며 “정책 환경 변화에 따른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고, 북미 고객에 대한 대응 속도와 유연성도 함께 강화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기존 인천 송도 대규모 공장 위주 전략에서 벗어나, 환자와 고객사에 물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에 생산거점을 둠으로써 납기 단축과 물류비 절감, 사업 연속성 확보 효과를 동시에 노리겠다는 구상이다.

 

국내 바이오 기업의 미국 생산기지 확보 흐름은 셀트리온이 포문을 열었다. 셀트리온은 지난 9월 일라이 릴리와 약 4600억원 규모의 미국 현지 생산시설 인수 계약을 체결하며 미국 관세 리스크를 사실상 해소했다. 셀트리온은 공장 인수 및 운영에 7000억원, 이후 증설에 7000억원 등 총 1조4000억원을 투입하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놨다. 인수는 연내 마무리하고, 완료 즉시 일라이 릴리 원료의약품 위탁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셀트리온은 특히 생산능력 확대를 전제로 미국 공장을 설계하고 있다. 향후 5년에 걸쳐 6만6000리터 규모 생산능력 증설을 추진해, 자체 바이오시밀러와 신규 바이오신약 파이프라인까지 미국에서 직접 생산하는 체제를 구축한다는 목표다. 이는 단순히 관세를 피하는 차원을 넘어, 글로벌 빅파마와 동등한 수준의 현지 생산 인프라를 확보하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이전에 이미 미국 내 생산기지를 확보해 선제적으로 리스크를 줄인 곳도 있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2023년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으로부터 뉴욕 시러큐스 공장을 인수해 가동 중이다. 이 공장은 대규모 상업 생산이 가능한 설비를 갖추고 있어,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CDMO 사업을 본격 확대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미국 내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관세 인상 부담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도 유리하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SK바이오팜은 완전한 자가 공장 인수 대신 미국 내 위탁생산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있다. 회사는 올해 2월 미국 식품의약국 승인을 받은 현지 CMO 생산시설을 확보해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를 생산 중이다. 자본을 직접 투입해 공장을 사들이기보다, 이미 검증된 미국 CMO 설비를 활용해 관세 인상 가능성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CDMO와 CMO를 조합한 이 같은 ‘자산 가벼운’ 전략은 중견급 제약사의 리스크 분산 모델로 거론된다.

 

글로벌 정책 환경 변화는 이런 움직임에 직접적인 동인이 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주요 제약사 9곳과 최혜국 대우 약가 인하 협정을 체결해 이들 기업이 향후 3년간 무관세 혜택을 받게 된 점이 대표적이다. 이 조치가 현재 행정부에서 그대로 유지될지는 미지수지만, 업계는 미국 내 생산기지를 보유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사이의 규제·세제 격차가 커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기환 한국바이오협회 전무는 “관세와 더불어 중국 생물보안법 이슈 모두를 돌파할 수 있는 방안이 미국 현지 공장 인수”라고 설명했다. 중국이 자국 내 바이오데이터와 생산시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중국에 의존하던 생산과 임상시험 일부를 미국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는 “3년 동안 국내 기업들에게는 미국 내 생산 사이트가 없으면 불리해지는 구조가 될 수 있다”며 “특히 우시 바이오로직스가 생물보안법 리스크로 흔들리는 가운데, 그 빈자리를 채우려면 관세 문제를 먼저 해소한 기업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바이오 공급망은 반도체 못지않게 전략산업 차원의 재편이 진행 중이다. 미국은 자국 내 바이오 제조 인프라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조정하고 있고, 중국은 생물보안법과 데이터 규제를 통해 자국 내 바이오 자산을 전략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생산기지를 다변화해 양국 간 규제 충돌을 피해 가는 ‘바이오 중립지대’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향후 5년 안에 미국 내 생산거점을 확보한 CDMO와 그렇지 않은 기업 사이에 수주 격차가 벌어질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서는 관세와 규제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파트너를 선호할 수밖에 없고, 미국 내 공장을 가진 기업이 그 요건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투자 부담과 운영 리스크는 커지겠지만, 빅파마와의 장기 계약 및 고부가가치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서는 사실상 필수 인프라가 됐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미국 공장 인수가 실제 글로벌 수주 확대와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관세와 생물보안 규제의 방향성이 명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현지 생산기지를 둘러싼 전략적 선택이 향후 CDMO 산업의 판도를 가를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한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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