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터 없이 원형편광 구현"…UNIST, 초고휘도 PeLED로 3D 혁신 예고
3D 디스플레이 기술이 오랜 기간 안고 있던 ‘어두운 화면’ 문제가 해소될 가능성이 커졌다. 3D 상영관에서 관객이 체감하는 낮은 밝기는 원형편광 필터를 거치며 빛의 상당 부분이 손실되기 때문이다. 국내 연구진이 이 필터를 아예 없애고도 원형편광을 직접 만들어내는 발광소자를 개발하면서, 차세대 3D TV와 영화관은 물론 편광을 정보 단위로 쓰는 보안·통신 분야까지 파장이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디스플레이와 양자정보 통신을 동시에 겨냥한 ‘편광 발광 소자 경쟁’의 분기점으로 보는 분위기다.
울산과학기술원 신소재공학과 송명훈·이승걸 교수팀은 페로브스카이트 발광층 내부에 특수 키랄 분자 두 종을 동시에 도입해, 외부 편광필터 없이도 고순도의 원형편광을 선택적으로 방출하는 페로브스카이트 LED를 개발했다고 29일 밝혔다. 연구 결과는 12월 3일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펑셔널 머터리얼즈 온라인판에 게재됐으며 정식 출판을 앞두고 있다.

원형편광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공간을 진행하면서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빛의 한 형태로, 회전 방향이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 두 가지로 나뉜다. 기존 3D 디스플레이에서 쓰이는 원형편광은 일반 LED나 프로젝터에서 나온 빛을 편광필터에 통과시켜 필요한 회전 방향의 성분만 골라내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빛은 대부분 흡수되거나 반사돼 실제 화면 밝기가 크게 떨어진다.
연구팀이 구현한 PeLED는 소자 자체가 처음부터 특정 방향으로 회전하는 원형편광 빛을 낸다. 핵심은 발광층으로 쓰인 페로브스카이트 결정 구조에 키랄 분자를 주입한 점이다. 키랄 분자는 왼손과 오른손처럼 거울상 관계이지만 서로 완전히 겹칠 수 없는 비대칭 분자를 뜻한다. 이런 분자를 페로브스카이트 결정 내에 도입하면 결정 격자 전체가 한 방향으로 비틀린 구조를 형성하고, 그 내부에서 재결합하며 나오는 빛 역시 특정 방향으로 회전하는 원형편광 상태를 띠게 된다.
지금까지는 키랄 분자 한 종류만 첨가하는 방식이 주로 시도됐지만, 결정 구조의 비틀림이 소자 전체에 균일하게 전달되지 못해 편광의 순도가 낮고 발광 효율도 떨어지는 한계가 있었다. 순도가 낮다는 것은 좌회전과 우회전 성분이 섞여 나오는 비율이 크다는 뜻으로, 디스플레이에서는 입체감 저하로, 통신에서는 신호 오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UNIST 연구팀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역할이 다른 두 종류의 키랄 분자를 동시에 도입하는 이중 설계 전략을 택했다. 메틸벤질 암모늄은 페로브스카이트층 사이에 삽입돼 전체적인 비틀림 방향을 정렬하는 역할을 한다. 이 분자가 층간 구조에 토대를 제공하면서 결정 전반에 걸쳐 편광 방향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유도한다. 여기에 비나프틸 인산염을 함께 넣어 구조 비틀림 과정에서 생겨나는 결함을 줄이고 결정 안정성을 높였다. 이 분자는 표면과 계면에 존재하는 불완전 결합을 보완해 전하가 빠져나가는 비복사 손실을 줄이고, 결과적으로 발광 효율과 소자 수명을 개선하는 데 기여한다.
연구팀은 이론 계산과 광학 측정을 통해 이러한 구조 변화가 실제 빛의 회전 방향과 밝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검증했다. 계산 결과, 이중 키랄 분자 도입으로 인해 페로브스카이트 결정의 비대칭 정도와 국소 전자구조가 변화하면서 특정 편광 상태의 광방출 확률이 크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에서도 원형편광 발광의 좌우 비율을 나타내는 편광 순도 지표가 기존 단일 키랄 첨가 방식 대비 유의미하게 향상됐고, 전체 발광 강도 역시 높게 유지되는 것이 확인됐다.
특히 원형편광 방향의 순도가 크게 개선된 점은 보안과 양자정보 통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편광 방향을 정확히 구분해 0과 1의 디지털 정보로 사용하는 통신 시스템에서는 좌회전과 우회전 성분이 섞여 있을수록 수신기에서의 판독 오류가 커진다. 고순도 편광 발광 소자를 이용하면 송신 단계에서부터 원하는 방향의 편광만 강하게 방출할 수 있어, 필터와 증폭기 등에 따른 손실을 줄이면서도 신호 대 잡음비를 개선할 수 있다. 양자암호 통신에서 편광 상태는 양자 비트를 구현하는 핵심 자원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재현성 높은 편광 광원을 확보하는 것이 기술 경쟁력으로 직결된다.
3D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도 수혜가 예상된다. 기존 상영관과 TV는 밝기 손실을 보완하기 위해 광원 출력을 높이고 추가 광학계를 적용해 비용과 에너지 소모가 커지는 구조였다. PeLED처럼 소자 단계에서 원하는 방향의 원형편광을 바로 내보낼 수 있다면, 필터 수를 줄이고 광학계를 단순화해 더 밝고 가벼운 3D 디스플레이 설계가 가능해진다. 이는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나 증강현실 기기 등 차세대 몰입형 기기 설계에도 직결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페로브스카이트를 차세대 디스플레이와 태양광 소재로 보는 경쟁이 가속화된 상황이다. 미국과 유럽 일부 연구팀은 편광 제어가 가능한 나노구조와 메타표면을 활용해 원형편광을 만들어내는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나, 대부분 별도의 광학구조를 추가하는 방식이어서 공정 복잡도와 비용이 높다. UNIST 연구팀의 결과는 발광층 자체의 화학적 설계만으로 편광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공정 단순화와 대면적 생산 측면에서 강점이 있는 접근으로 평가된다.
송명훈 교수는 페로브스카이트 LED가 이미 상용화된 OLED에 비해 재료비와 제조 공정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페로브스카이트 기반 소자는 용액 공정을 통해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에서 제작할 수 있어 장비 투자 부담이 적고, 발광 효율 또한 원형편광 구현 측면에서 경쟁력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기술이 필터 없는 고휘도 3D 디스플레이 등 차세대 시각 디스플레이 시장뿐 아니라 양자 암호 통신과 같은 고부가가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핵심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연구는 한국연구재단 지원으로 수행됐다. 산업계에서는 원형편광 PeLED가 실제 양산 공정에 얼마나 빠르게 접목될 수 있을지, 또 다른 파장대와 색 재현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에 주목하고 있다. 기술과 시장, 그리고 관련 표준화 논의가 어떤 속도로 맞물릴지가 차세대 편광 기반 디스플레이와 양자통신 생태계의 향배를 가를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