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공단, 책임비율도 안 따졌다"…권익위, 구상권 행사 관행에 제동
건강보험 재정 운용을 둘러싼 분쟁이 다시 불거졌다. 국민권익위원회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구상권 행사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며 책임 비율 산정부터 하라는 제도 개선 의견을 내면서, 공단의 손해배상 청구 절차 전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일 건강보험 구상권을 행사할 때는 각 당사자의 책임 비율을 먼저 산정한 뒤 그에 따라 합리적으로 구상금을 청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국민건강보험공단에 표명했다고 밝혔다.

사건의 발단은 한 여행사의 민원 제기였다. 여행사를 운영하는 A씨는 소비자 B씨에게 해외 패키지여행 상품을 판매했다. 그런데 B씨가 여행 중 계단에서 넘어져 부상을 입었고, 이후 국내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B씨의 사고가 여행 일정 중 발생했다는 이유를 들어, 여행사에도 책임이 있다며 공단이 부담한 치료비 전액을 A씨에게 구상금으로 청구했다. A씨는 여행 전 안전수칙과 유의사항을 충분히 안내했고, 사고 경위 등을 고려할 때 모든 비용을 떠안는 것은 부당하다며 권익위에 민원을 제기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검토 결과 공단의 청구 방식에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권익위는 "A씨 책임이 인정되더라도 실제 책임 비율에 따라 구상금이 청구돼야 하나 공단은 어떤 산정 절차도 진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책임 비율을 산정한 뒤 구상권 행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책임 비율 평가 없이 치료비 전액을 구상하는 관행에 제동을 건 셈이다.
권익위는 또 제도 개선 권고도 병행했다. 권익위는 "향후 유사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구상권 청구 시 전문가 자문을 거쳐 책임 비율을 산정하는 등 내부 절차를 마련하라"며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제도개선 의견을 전달했다. 법률·보험·의학 등 관련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해 구상 여부와 금액을 결정하라는 취지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건강보험법에 따라 교통사고, 산업재해, 시설물 사고 등 제3자의 책임이 있는 사고에서 보험급여를 지급한 경우, 가해자나 책임 있는 자를 상대로 그 비용을 구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공단이 일정한 책임 비율 산정 없이 일괄적으로 치료비를 청구해 사업자나 개인이 과도한 부담을 안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선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 확보라는 명분 아래 과도한 구상권 행사가 반복될 경우, 영세 사업자와 중소기업에 미치는 압박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어 왔다. 이번 권익위 판단을 계기로 공단의 구상권 행사가 보다 정교한 책임 평가를 전제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국민권익위원회는 향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제도 개선 이행 여부를 점검하는 한편, 유사 민원이 접수되면 이번 사례를 기준으로 구상권 행사 절차의 적정성을 면밀히 검토할 방침이다. 정치권도 건강보험 재정과 국민·사업자의 부담 사이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제도 개선 논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