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굿즈 된 은행달력”…앱 연동 마케팅 경쟁 격화
연말마다 반복되던 은행권 ‘달력 전쟁’이 올해는 디지털 금융 마케팅 경쟁 구도로 번지고 있다. 은행들이 종이 달력 제작 물량을 줄이면서도 모바일 앱을 통한 선착순 신청, 캐릭터·아티스트 협업 등 IT 채널을 전면에 내세운 덕에 달력이 일종의 ‘디지털 굿즈’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특히 우리은행이 선보인 아이유 탁상달력은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웃돈이 붙을 정도로 인기를 끌며, 단순 사은품을 넘어 브랜드 팬덤을 금융 플랫폼으로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ESG 경영 기조 속에서도 고객 접점을 잃지 않기 위한 ‘앱 중심 경품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은행권 현장에서는 이미 수요 쏠림의 후폭풍이 감지된다. 한 직장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에 따르면, 한 시중은행 지점은 재고 소진을 안내했음에도 고객이 “몇 년째 거래하는지 아느냐”고 항의하며 지점 내에 걸려 있던 달력을 떼어 갔다는 사연까지 전해졌다. 특히 우리은행의 경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모델 아이유를 앞세운 탁상달력을 제작하고, 자사 모바일 앱 우리WON뱅킹을 통해 1만 명 대상 무료 배포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은행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모델이 아이유인 만큼 앱 내 문의와 참여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모바일 앱을 전면에 내세운 디지털 채널 연계 전략은 다른 시중은행에도 빠르게 확산됐다. NH농협은행은 지난달 25일부터 모바일 앱 NH올원뱅크에서 선착순 방식으로 2만5000부의 달력을 배포했다. 신청 창구를 전면 디지털로 일원화한 덕에 오프라인 창구 혼잡은 줄었지만, 물량이 1시간도 안 돼 소진되면서 오히려 앱 이용자들의 ‘접속 전쟁’이 벌어졌다. 금융권에서는 “달력 배포를 모바일로 묶어 두면, 이벤트 참여를 위해서라도 앱 설치와 로그인, 간편인증 등록까지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이번 달력 품귀 현상의 배경에는 ESG 경영과 비용 절감 기조가 자리한다. 은행들은 인쇄물과 홍보물 제작을 줄이는 방향으로 예산을 조정하는 한편, 꼭 필요한 물량만 목표 고객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과거처럼 ‘원하면 누구나 가져가는’ 소모성 사은품에서, 디지털 채널을 통해 사전 신청을 해야 하는 한정판 굿즈로 성격이 바뀌었다. 특히 ‘걸어두면 금전운이 오른다’는 속설까지 겹치며, 실제 달력을 받지 못한 고객들이 중고거래 플랫폼으로 몰리는 풍선효과가 관측된다.
실제 중고거래 플랫폼에는 우리은행 아이유 달력을 포함한 주요 시중은행 달력이 5000원에서 1만원대에 거래되는 게시글이 다수 눈에 띈다. 정가가 없는 무료 사은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희소성과 팬덤이 가격을 형성하는 전형적인 굿즈 시장 구조가 그대로 복제된 셈이다. 금융 IT 업계에서는 “오프라인 사은품이지만, 실질적인 출발점은 은행 앱이라는 점에서 디지털 채널 트래픽을 확대하는 일종의 진입 인센티브로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지점 단위 운영 전략도 디지털·데이터 축으로 재편되는 분위기다. 같은 은행이라도 지점마다 달력 배포 기준은 제각각이다. 주거래 고객이나 모바일 앱 이용 고객을 우선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신규 카드 개설 고객에게만 제공하는 지점도 있다. 디지털 채널 기반 고객 데이터를 활용해 ‘고객 생애 가치’가 높은 이용자부터 달력을 배분하는 구조가 점차 일반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희소성 높은 굿즈를 데이터 기반 VIP 관리 도구로 전환하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콘텐츠 전략도 한층 정교해졌다. KB국민은행은 그룹 캐릭터 스타프렌즈를 활용해 문학작품 장면을 재해석한 달력을 선보이며, 금융과 문화 콘텐츠를 결합한 스토리텔링에 집중했다. 하나은행은 백남준 서거 20주기를 맞아 백남준아트센터와 협업한 달력을 제작해 디지털 아트와 금융 브랜드 이미지를 연계했다. 신한은행 역시 자체 캐릭터 신한 프렌즈와 일러스트를 활용한 달력을 내놓으며, 앱·SNS 채널에서 연계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기존 종이 달력이 단순 날짜 안내를 넘어, 디지털 브랜딩을 확장하는 플랫폼 역할을 맡기 시작한 셈이다.
글로벌 금융권에서도 종이 인쇄물 축소와 모바일 채널 강화 흐름이 이어지고 있으나, 국내처럼 특정 달력이 팬덤 마케팅과 겹치며 중고거래 시장까지 형성된 사례는 드물다. 일부 해외 은행·핀테크 기업이 한정판 카드 디자인이나 디지털 스티커, 앱 전용 테마를 제공해 이용자를 끌어들이는 것과 유사한 전략이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이를 전통적인 달력 문화에 접목해 독특한 IT 융합 마케팅 모델로 소화한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은행권이 종이 달력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대신, 앱 기반 디지털 캘린더나 위젯, 캐릭터 테마 등 소프트웨어형 굿즈를 확대할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다만 오랜 기간 형성된 ‘연말 은행 달력’에 대한 이용자 기대가 여전한 만큼, 물량과 채널, ESG를 동시에 고려한 세밀한 균형 조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계는 오프라인 한정판과 디지털 굿즈를 결합한 이번 시도가 실제로 고객 충성도와 앱 이용률 제고라는 성과로 이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