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김일성 지시" 허위 판단…법원, 태영호에 4·3유족회 명예훼손 배상 명령
역사 왜곡 논란과 4·3 단체들의 문제 제기가 법정에서 맞붙었다. 제주4·3사건을 둘러싼 정치권 갈등 속에서 법원이 처음으로 정치인의 발언에 대해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책임을 인정하면서, 향후 관련 입법 논의에도 파장이 예상된다.
제주지방법원 민사3단독 오지애 부장판사는 1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제주4·3희생자유족회 등이 태영호 전 국민의힘 국회의원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 선고 공판을 열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태 전 의원이 제주4·3희생자유족회에 1천만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이번 소송은 태 전 의원이 2023년 2월 사회관계망서비스와 각종 자료 배포를 통해 "4·3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한 데 대해 제기됐다. 4·3 단체들은 해당 발언이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를 부정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같은 해 6월 법원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정부 공식 자료에 기초해 태 전 의원의 발언을 허위로 판단했다. 오지애 부장판사는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등에 비춰보면 태씨 발언은 허위 사실로 봄이 타당하다"고 밝히고, "이에 따라 4·3 사건 희생자들의 진상 규명과 명예를 회복할 목적으로 구성된 4·3희생자유족회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재판부는 개별 유족에 대한 명예훼손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오 부장판사는 "태씨 발언이 4·3사건 희생자나 유족 개별 구성원을 지칭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어 4·3희생자유족회를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의 청구는 기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김창범 회장과 4·3행방불명인유족회장 양성홍 회장, 생존 희생자 오영종 씨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송에서 4·3 단체들은 "태 의원의 허위사실 유포로 희생자와 유족 명예를 훼손해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며, "이 소송을 통해 왜곡과 선동으로 4·3 희생자와 유족, 관련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에 대해 공적인 제재가 필요함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손해배상 청구액은 소액사건 기준인 3천만원을 넘어선 3천만100원으로 책정됐다.
반면 태영호 전 의원 측은 발언의 허위성과 위법성을 전면 부인했다. 태 전 의원 측은 "태 전 의원의 주장은 허위 사실이라고 할 수 없고 명예훼손 행위에도 해당하지 않으며, 피해자가 특정됐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맞섰다. 4·3사건의 역사적 성격과 발발 배경을 둘러싼 인식 차이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진 셈이다.
절차 진행 과정은 길어졌다. 당초 1심 선고는 2024년 7월 열릴 예정이었지만 태 전 의원 측 요청으로 변론이 재개됐다. 이후 지난달 10일로 다시 선고기일이 잡혔으나, 공판 직전 재판 일정이 연기되면서 유족들이 소송을 제기한 지 약 2년 6개월이 지난 뒤에야 선고가 내려졌다.
판결 직후 유족단체들은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미를 부각했다. 제주4·3유족회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제주지방법원 정문에서 "4·3 희생자의 명예와 유족의 아픈 마음을 치유해 준 사법부 판결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두 단체는 또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태 전 의원의 진정성 없는 태도와 무책임한 회피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오늘 판결은 태 전 의원의 왜곡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준엄한 심판이라고 본다"고 비판 수위를 높였다.
유족단체는 판결을 계기로 입법 조치도 요구했다. 이들 단체는 "이번 판결은 4·3에 대한 왜곡과 선동으로 희생자와 유족 명예를 훼손하는 것에 대해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국회와 정부는 4·3 왜곡·폄훼에 대한 처벌 규정이 담긴 4·3특별법 개정안을 즉각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치권에선 이번 선고가 4·3특별법 개정 논의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4·3 관련 단체들은 그간 왜곡·폄훼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특별법에 포함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고, 일부 정당과 의원들도 형사처벌과 손해배상 청구를 뒷받침하는 입법 필요성을 제기해 왔다. 반면 표현의 자유 위축을 우려하는 시각도 존재해 갈등이 이어져 왔다.
법원 판단이 나온 만큼, 국회 차원에서도 관련 법안 심사가 다시 가속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유족단체와 인권단체는 향후 항소심 진행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4·3특별법 개정을 통한 제도적 보호 장치 마련을 계속 요구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