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도 제약허브 부상…미국발 재편에 글로벌 다극화
헬스케어 산업 권력이 미국과 유럽에 집중됐던 구도가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제약바이오 생산과 연구개발, 임상시험의 축이 미국 단극 체제에서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다극화 구조로 이동하는 흐름이 가속 중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의 약가 규제와 제조 리쇼어링 정책, 연구비 삭감에 대응해 글로벌 제약사는 투자와 파이프라인 전략을 재조정하고 있으며, 중국과 인도는 임상과 혁신 허브로 부상하고 있어 향후 10년간 산업 질서 재편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헬스케어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는 최근 발간한 Nine for 2026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의 대전환 보고서에서 지난 20년간 이어진 미국 중심 제약바이오 패러다임이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2025년을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이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전환점으로 제시하며,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확대되는 다극화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행정부 정책 변화가 글로벌 제약산업 구조를 움직이는 출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제조업 리쇼어링을 위한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 약가 인하 압박, 규제 개혁, PBM 투명성 강화 등 복합적인 정책 패키지가 제약사의 생산 거점, 가격 전략, 공급망 의사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투자 흐름은 가장 먼저 미국으로 쏠리고 있다. 아이큐비아 집계에서 글로벌 톱20 제약사 가운데 70퍼센트가 미국 내 제조시설 신규 또는 증설 투자를 공약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누적 공약액은 5000억달러를 넘어섰다. 반면 중국과 기타 아시아, 유럽, 중남미 지역에 대한 제조 투자 계획은 정체된 양상으로 집계됐다. 다만 보고서는 이 중 상당 부분이 기존 설비 증설 계획을 정책 기조에 맞춰 재포장한 성격이거나 대미 정책 신호로 활용되는 측면도 있다고 짚었다.
가격정책 변화도 세계 시장을 재조정하는 변수로 꼽힌다. 미국의 MFN 최혜국 가격 적용은 미국 이외 국가의 약가 상향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영국과의 제로 관세 협상 논의는 미국 외 국가들이 미국 시장 가격을 기준점으로 재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보고서는 한국을 포함해 참조가격 시스템을 운영하는 국가에서 약가 산정 프레임워크 조정 논의가 촉발될 소지가 크다고 분석했다.
연구개발 생태계에서는 경고등이 켜졌다. 미국 국립보건원 2025년 예산안에는 전년 대비 39퍼센트, 약 180억달러에 이르는 대폭 감축안이 담겼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빠르게 확장됐던 mRNA 관련 정부 계약 약 5억달러 규모가 종료되고, 관련 그랜트 3억5000만달러 이상이 취소되면서 차세대 백신과 유전자치료제 연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다. 아이큐비아는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식품의약국이 승인한 신약 356개 가운데 354개가 NIH 지원을 받은 프로젝트에서 나왔다는 연구를 인용하며, 현재의 예산 축소가 10년 뒤 글로벌 파이프라인에 중대한 공백을 남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조정 기조와 대조적으로 중국은 임상과 파트너십에서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지난해 기준 중국에 본사를 둔 기업들의 임상시험 개시 건수는 처음으로 미국을 추월했다. 임상시험 개시는 후보물질이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검증 단계로 진입했다는 지표인 만큼, 중국 내에서 글로벌 기준의 신약후보 개발 역량이 빠르게 쌓이고 있다는 의미다. 올해 상반기에만 중국 기업들이 체결한 글로벌 제휴 및 라이선스 계약 규모는 485억달러에 달해 2024년 전체 파트너십 대비 8퍼센트 증가했다. 다국적 제약사의 중국 신약 기술도입과 역외 공동개발 계약이 늘어나면서 중국발 혁신 파이프라인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는 기존 제네릭 제조 허브에서 한 단계 나아가 혁신 허브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글로벌 임상시험 점유율 변화를 보면 인도는 109퍼센트포인트 증가해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같은 기간 중국은 28퍼센트포인트 상승한 반면 미국은 1퍼센트포인트 증가에 그쳤고, 유럽 주요 4개국은 12퍼센트포인트 감소, 영국과 일본은 각각 40퍼센트포인트, 53퍼센트포인트 감소세를 기록했다. 임상시험 수행의 무게 중심이 전통적 선진국에서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신흥국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이 같은 지형 변화의 배경에는 규제 속도와 인력, 비용 구조 차이가 자리한다. 중국과 인도는 규제 절차 간소화와 임상 인프라 확충, 영어권 인력 확보를 앞세워 다국적 제약사의 글로벌 임상 허브로 자리잡는 흐름이다. 상대적으로 인건비와 환자 모집 비용이 낮고, 고혈압·당뇨 등 대사성질환부터 암, 희귀질환까지 다양한 적응증 환자군을 확보할 수 있어 임상 개발 속도를 높이기에 유리하다는 평가다.
글로벌 경쟁 구도에서는 AI 활용이 새로운 변곡점으로 부각된다. 보고서는 의료진 인게이지먼트와 임상개발 전 과정에 AI가 깊숙이 침투하면서, 데이터를 많이 보유한 플레이어와 디지털 인프라를 갖춘 국가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후보물질 탐색과 임상시험 설계, 환자 모집 최적화 같은 영역에서 AI 기반 시뮬레이션과 예측 모델이 본격 활용되면, 인력 중심이던 기존 임상 패러다임이 데이터와 알고리즘 중심 체제로 전환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정책과 규제 환경은 변수이자 지렛대다. 미국의 약가 규제 강화와 연구비 삭감이 혁신 인센티브를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반면, 중국과 인도는 임상 심사 효율화와 데이터 규제 완화를 통해 글로벌 프로젝트 유치에 나서고 있다. 다만 의료 데이터 국외 이전 제한, 임상 데이터 품질과 투명성 확보, 윤리 심사 체계 정비 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각국 규제 당국이 AI 기반 임상 설계와 원격 모니터링 같은 디지털 도구를 어떻게 평가하고 인정할지에 따라 기업 전략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아이큐비아는 미국 중심 질서의 재편과 중국·인도의 혁신 허브 부상, AI 확산이 단기 유행이 아니라 산업 구조를 바꾸는 장기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생산 거점과 임상 네트워크, 데이터 인프라를 재정렬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며, 어느 국가와 기술 축에 올라타느냐에 따라 향후 10년 경쟁력이 갈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계는 다극화된 헬스케어 질서 속에서 새롭게 형성될 규제와 공급망, 데이터 생태계가 실제 시장에 어떻게 안착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