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제주도민 30만 희생도 무방했다던 인물”…박진경 국가유공자 지정에 4·3 단체 반발

정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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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의 기억을 둘러싼 갈등과 이재명 정부가 맞붙었다. 제주4·3 당시 강경 진압을 지휘한 고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주 지역 시민사회와 진보정당이 강하게 반발하며 지정 취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국가폭력 책임자를 추앙하는 결정이 4·3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 기조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주장이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10일 성명을 내고 국가보훈부를 겨냥했다. 위원회는 “국가보훈부가 그를 무공수훈자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로 인정한 것은 수많은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을 부정하는 행위”라며 박진경 대령에 대한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를 촉구했다. 이어 “가해 책임이 있는 인물을 국가유공자로 추앙하는 것은 희생자와 유족 명예를 다시 한번 짓밟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위원회는 제도 개선 요구도 함께 제기했다. 성명에서 “지금이라도 국가유공자 인정을 취소하고, 역사의 단죄 대상이 국가유공자가 다시는 될 수 없도록 관련 제규정 정비에도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제주도는 최근 박진경 등 4·3 학살 주범 등에 대한 객관적인 안내판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며 “제주도라도 4·3 유족과 도민 명예회복을 위해 신속하게 역사를 바로잡아달라”고 제주특별자치도에 거듭 요구했다.

 

정치권에서도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문대림 의원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유감을 표했다. 문 의원은 “‘제주도민 30만을 모두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했던 인물에게 ‘애국정신의 귀감’이라는 표현이 담긴 증서가 수여된 것은 4·3 희생자와 유족, 도민 아픔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가유공자 제도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희생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운영돼서는 안 될 것”이라며 “잘못된 유공자 지정이 바로잡힐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

 

노동계와 진보 정당들도 강경한 입장을 내놨다. 민주노총 제주본부는 성명에서 “국가폭력 내란을 딛고 들어선 이재명 정부가 이래선 안된다. 국가폭력 역사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단죄 없이 내란의 완전한 종식도 없다”고 규탄했다. 이어 “국가폭력 행위에 동조하고 정의로운 역사에 반하는 국가보훈부 장관을 즉시 해임하고 4·3 유족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조국혁신당 제주도당은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위 자체를 문제 삼았다. 도당은 “국가보훈처는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자격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최소한의 정의와 양심을 회복하기 위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진보당 제주도당도 “진정한 해원은 4·3의 올바른 진상규명과 함께 다시는 4·3 왜곡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그 해원의 길에 재를 뿌렸다”고 비판하며 유공자 증서 철회를 촉구했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서울보훈지청은 지난해 10월 박진경 대령 유족이 낸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무공수훈을 근거로 승인했다. 이어 지난달 4일 이재명 대통령과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 직인이 찍힌 국가유공자증이 유족에게 전달됐다. 보훈부는 박 대령의 군 경력과 수훈 이력을 중심으로 심사를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당시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9연대장으로 부임해 도민에 대한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제주4·3 관련 단체들은 그를 양민 학살 책임자로 규정해 왔으며, 박 대령을 기리는 추도비와 시설물 설치를 두고도 오래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이 이어져 왔다.

 

제주도는 현재 박진경 추도비를 비롯해 4·3 왜곡 논란이 있는 시설물 전반에 대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안내판 설치를 추진 중이다. 도내 4·3 단체들은 이번 국가유공자 지정 논란을 계기로 안내판 문구와 설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고 있다.

 

이번 논란은 국가유공자 심사 기준이 과거 국가폭력과 인권 침해 책임 문제를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쟁점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역사 인식과 보훈 정책을 둘러싸고 추가 공방을 벌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강경 대응을 예고한 만큼, 국가보훈부와 대통령실이 어떠한 해명과 조정을 내놓을지에 따라 논란의 향배가 갈릴 전망이다. 국회는 향후 관련 상임위원회에서 보훈 심사 기준과 4·3 관련 보훈 정책 전반에 대한 점검에 나설 계획이다.

정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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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이재명정부#국가보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