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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식도 식품공학”…항공사, 삶은채소·과일 늘린다 안전·미각균형 노렸다

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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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단호박, 포도와 사과가 반복되는 기내식 메뉴 뒤에는 식품공학과 항공 환경 공학이 결합된 과학적 설계가 깔려 있다. 지상에서 대량으로 조리된 음식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상공으로 옮겨 다시 데워 제공하는 구조에서, 항공사는 식중독 위험과 품질 편차를 최소화해야 한다. 저압·저습의 특수한 기내 환경이 승객의 미각과 후각을 20~30퍼센트가량 둔화시키는 점도 고려 대상이다. 업계는 삶기와 찌기를 중심으로 한 채소와 차가운 과일 메뉴를 가장 안정적인 해법으로 보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기내식은 공항 인근 전문 기내식 센터에서 전량 조리된 뒤 냉장 또는 냉장·냉동 혼합 상태로 항공기에 실린다. 이 음식은 상공으로 운반된 뒤, 크루전용 오븐 등에서 재가열 과정을 거쳐 승객에게 제공된다. 다단계 운송과 온도 변화가 반복되는 구조상, 원료 관리와 조리 공정에서의 위해 요소 통제는 지상 레스토랑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이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삶기와 찌기 같은 습열 조리는 핵심 안전 장치로 작용한다. 충분한 가열을 전제로 한 공정은 세균 증식을 억제하고, 식중독을 유발할 수 있는 세균과 바이러스의 생존 가능성을 크게 낮춘다. 튀김이나 팬 프라잉처럼 기름을 많이 쓰는 건열 조리는 재가열 후 식감이 급격히 떨어지고 산패 위험도 높아, 고도 10킬로미터 상공에서 장시간 제공해야 하는 기내식에는 불리하다. 반면 수분을 충분히 머금은 삶은 채소는 온도 변동에 덜 민감하고, 재가열 이후에도 조직감 붕괴가 상대적으로 적어 품질 관리 측면에서 유리하다.

 

기내 환경이 인간의 감각 인지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하기 어렵다. 여객기가 순항 고도에 오르면 객실 안은 지상보다 낮은 압력으로 유지되고, 외부에서 유입되는 매우 건조한 공기가 기내 공조 시스템을 통해 순환한다. 이런 조건에서는 공기 중 냄새 분자 농도가 희석되고, 코와 입안 점막이 건조해지면서 후각 수용체와 미각 수용체의 반응 강도가 감소한다. 국제 항공업계에서는 지상 대비 20~30퍼센트 정도 맛 인지가 감소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밋밋해진 맛을 보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차갑게 제공되는 과일이다. 과당은 포도당과 비교해 단맛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하는 단당류인데, 온도가 낮을수록 단맛 인지가 더 또렷해지는 특성이 있다. 기내에서 과일은 대부분 냉장 상태로 제공돼 둔화된 미각을 부분적으로 보완하고, 개별 포장과 세척·살균 공정을 통해 미생물 오염 위험도 낮출 수 있다. 항공사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조리 변수가 적고, 승객 선호도가 높아 메뉴 구성에서 활용도가 크다.

 

항공사는 식재료 선택에서도 조리과학적 관점을 적용하고 있다. 브로콜리와 단호박은 구조적으로 수분 보유력이 높고, 재가열 후에도 색상과 형태 유지가 용이한 대표 식재료다. 가열과 냉각, 재가열이 반복돼도 과도한 갈변이나 조직 파괴가 덜해, 외관과 식감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포도와 사과 역시 껍질과 조직 구조가 비교적 단단해 장시간 보관과 기내 이동에 견디기 쉬운 동시에, 절단·세척 공정 후에도 품질 편차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이 선택의 배경이다.

 

최근에는 기내식이 단순한 기호식이 아니라, 장거리 비행에서의 소화 부담과 수분 유지, 장 기능까지 고려하는 일종의 기능성 식단으로 진화하는 흐름도 나타난다. 고도에서 혈액과 체액의 재분배가 이뤄지는 환경에서, 고지방·고염 메뉴는 체액 균형과 순환계 부담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채소와 과일 위주의 메뉴 구성은 상대적으로 나트륨과 포화지방 섭취량을 줄이고, 식이섬유 공급을 통해 소화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특히 저염식, 비건식, 글루텐프리 등 특수 기내식 옵션은 삶은 채소 기반 메뉴 비중을 더 끌어올리고 있다. 동물성 원료나 특정 알레르기 유발 물질을 제한해야 하는 만큼, 열처리 안정성이 입증된 채소류와 곡류, 과일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알레르겐 관리와 교차 오염 방지를 위해 생산 라인과 조리 도구를 엄격히 분리해야 하는 특수 기내식 공정 특성상, 열처리를 통한 미생물 제어와 식품 안전 확보는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

 

글로벌 항공업계는 동시에 승객 경험을 높이기 위한 미각 보정 전략도 강화하고 있다.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 계열 양념, 향이 강한 허브와 향신료, 고형분이 많이 남는 소스 등은 기내 환경에서 약해진 맛 인지를 보완하는 도구로 쓰인다. 일부 장거리 노선에서는 메뉴 개발 단계에서부터 조리 과학자와 감각 분석 전문가가 참여해, 고도 환경을 모사한 저압·저습 조건에서 미각 테스트를 진행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한편 식품의약품안전처를 비롯한 각국 규제 기관은 기내식 안전 관리를 위해 HACCP를 포함한 위생 관리 체계를 요구하며, 대규모 집단 식중독 사고를 막기 위한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추세다. 항공사에 공급되는 식재료는 배송·보관 과정에서의 콜드체인 유지 여부, 생산지 이력, 알레르겐 정보까지 추적 가능한 형태로 관리돼야 한다. 항공산업 특성상 한 번 비행이 시작되면 지상 의료 인프라 접근이 어려운 만큼, 사전 예방 중심의 식품 안전 전략이 무엇보다 중시된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기내식 구성은 식품 안전과 기내 환경, 탑승객의 건강 상태 변화를 모두 고려하는 복합적인 과학 절차라고 설명한다. 특히 장거리 노선에서는 조리 안전뿐 아니라 소화 부담, 수분 유지, 재가열 후 품질 유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메뉴를 설계하고, 그 과정에서 삶은 채소와 과일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산업계는 앞으로 고도 환경까지 반영한 맞춤형 식단 설계 기술이 보편화될지 주시하고 있다.

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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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식#항공사#식품의약품안전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