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바이오

“두뇌를 이중언어로 쓴다”…다언어 습관, 생물학적 노화 늦춘다

조보라 기자
입력

다언어 사용이 고령층의 생물학적 노화를 늦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됐다. 일상에서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오가며 사용하는 습관이 인지 기능을 꾸준히 자극해, 신체와 뇌의 실제 노화 속도를 또래보다 늦출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인공지능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와 뇌 건강 관리 시장이 확대되는 가운데, 언어 사용 패턴 같은 생활습관 데이터가 새로운 바이오마커 후보로 부상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번 연구를 고령화 사회에서 인지 건강 관리 전략을 재설계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는 결과로 보고 있다.

 

지난달 11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노화에 실린 논문에서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아구스틴 이바녜즈 교수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팀은 유럽 27개국에 거주하는 8만 6149명의 데이터를 분석해 다언어 사용과 노화 속도 간 상관관계를 제시했다. 참여자 평균 연령은 66점5세로, 고령층 인구를 폭넓게 포함했다. 연구진은 실제 나이와 건강 상태, 생활 습관으로 예측한 나이의 차이를 나타내는 생체행동적 연령 격차 지표를 활용해 개인별 노화 가속 여부를 평가했다.

분석 결과 일상에서 한 개 언어만 사용하는 사람은 두 개 이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보다 생물학적 노화가 가속될 가능성이 약 43퍼센트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연령, 교육 수준, 신체 활동, 사회적 활동 등 주요 교란 요인을 반영해 통계 모델을 보정했음에도 이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유지됐다고 밝혔다. 단순한 사회경제적 배경 차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연관성이 확인됐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다언어 사용이 노화를 늦추는 생물학적 기전을 직접적으로 규명한 단계는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언어 전환 과정이 뇌 인지 네트워크 전반을 반복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다양한 언어를 상황에 따라 선택해 말하고 이해하는 동안 기억력, 주의 전환, 억제 조절, 계획 수립 같은 실행 기능이 동시에 동원된다. 이런 멀티 태스킹형 인지 부하가 장기간 누적될 경우 뇌의 기능적 예비력, 이른바 인지 예비력을 높여 노화에 따른 기능 저하를 늦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이번 연구는 언어 사용을 단순한 문화적 습관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건강 지표 후보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최근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스마트폰 대화 로그, 음성 패턴, 키보드 입력 습관 등 일상 언어 데이터를 활용해 우울증, 치매, 파킨슨병 조기 징후를 탐지하는 인공지능 모델 개발이 활발하다. 여기에 다언어 노출과 사용 빈도 같은 변수를 결합하면, 연령 대비 인지 건강 상태를 보다 정교하게 예측하는 새로운 디지털 바이오마커가 등장할 여지도 있다.

 

글로벌 헬스케어 시장에서는 이미 인지 건강 관리가 중요한 사업 축으로 부상한 상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두뇌 훈련 애플리케이션, 게임화된 인지 재활 프로그램, 가상현실 기반 치매 예방 콘텐츠 등이 상용화 단계에 들어섰다. 이번 결과는 여기에 언어 교육과 다언어 사용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인지 헬스케어 서비스 모델을 자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령층 대상 온라인 언어 교실, 다언어 회화 기반 소셜 네트워크, 언어 전환 과제를 포함한 디지털 치료 프로그램 등이 구체적 사업 아이템으로 거론될 수 있다.

 

국내외에서 진행돼 온 선행 연구들도 다언어 사용과 인지 건강 사이의 연관성을 뒷받침해왔다. 일부 관찰 연구에서는 두 개 이상 언어를 사용하는 고령층이 단일 언어 사용자보다 치매 발현 시기가 수년 늦게 나타났다고 보고된 바 있다. 다만 이전 연구들은 표본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거나 특정 국가에 한정된 경우가 많아 일반화에 제약이 있었다. 이번 연구는 유럽 27개국, 8만 명이 넘는 대규모 데이터를 활용해 통계적 신뢰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국가 정책 차원에서도 함의가 크다. 초고령 사회로 접어든 유럽과 한국은 치매와 경도인지장애 관리에 막대한 의료비를 투입하고 있다. 이번 결과는 고령층 대상 평생교육, 지역 커뮤니티 센터, 온라인 공개강좌 프로그램에 다언어 교육과 언어 기반 인지 훈련을 적극적으로 편성할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비용이 큰 장비나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도 비교적 저비용으로 접근 가능한 비약물적 중재 옵션이라는 점도 정책 설계자에게 매력적인 지점이다.

 

규제와 제도 측면에서는 언어 데이터를 다루는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가 개인정보와 민감 정보 보호 규범을 준수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대화 로그와 음성 정보는 개인의 정체성과 사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데이터이기 때문에 데이터 최소 수집과 가명처리, 알고리즘 투명성 확보가 요구된다. 유럽 일반개인정보보호법과 각국 개인정보 보호법은 건강 관련 데이터의 활용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어, 언어 기반 인지 평가 서비스를 상용화하려는 기업이 넘어야 할 규제 허들도 적지 않다.

 

연구팀은 이번 결과를 가리켜 인과관계를 확정하기보다는 정교한 가설을 제시한 단계로 평가했다. 다언어 사용이 실제로 노화를 늦추는 원인인지, 아니면 원래 인지 기능이 우수한 사람이 다언어를 더 잘 습득하는 결과인지 구분하려면, 장기간 추적 관찰과 무작위 개입 연구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생체행동적 연령 격차 지표를 유전체 정보, 뇌영상 데이터, 웨어러블 디바이스의 생체신호와 통합해 분석하는 후속 연구도 제안했다.

 

아구스틴 이바녜즈 교수 연구팀은 다언어 사용이 뇌 건강 유지에 기여할 가능성이 확인된 만큼, 향후에는 개입 연구를 통해 언어 학습 프로그램이 실제로 생물학적 노화 지표를 변화시키는지 검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산업계와 의료계는 언어 습관이라는 일상적 행동 데이터가 디지털 바이오마커와 인지 건강 서비스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조보라 기자
share-band
밴드
URL복사
#아구스틴이바녜즈#트리니티칼리지더블린#natureag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