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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 고요에 머문다”…영천에서 만나는 예술과 미식의 산책

정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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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걷고 싶은 길이 생긴다. 붉게 물든 나뭇잎과 낮은 햇살, 바람이 속삭이는 고요 속을 걷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눈에 띄는 유명 여행지를 찾았다면, 요즘은 자연과 예술, 그리고 로컬 미식을 모두 품은 동네가 오히려 마음을 끈다. 그래서일까. 경북 영천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깊어졌다.

 

영천 시안미술관을 찾은 이정은(34) 씨는 “옛 교정에 서면 학창시절이 생각나고, 미술관 건물 안을 거닐다 보면 고요함과 설렘이 공존한다”고 표현했다. 학교의 흔적 위에 세워진 시안미술관은 현대 건축과 추억이 만나는 공간이다. 가을빛 물든 마당,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전시, 그리고 느리게 번지는 음악이 마음 한구석을 어루만진다. 이곳은 도시의 빠른 리듬에서 벗어나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숨은 쉼터로 자리 잡았다.

어라연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어라연 출처 :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소도시 미술관과 지역 맛집을 찾는 국내 여행객 비율은 지난해 대비 18%가량 증가했다.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은해사 또한 깊은 역사의 숨결과 늦가을 고찰의 정취를 찾으려는 방문객이 늘고 있다. 국보와 문화재가 전해주는 시간의 무게, 천년 고찰을 스치는 바람에 실린 오래된 이야기들은 단지 여행이 아닌 감정의 여유를 선사한다.

 

여행 연구가 김은우 씨는 “도시는 속도가 전부였지만,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은 경험의 깊이, 자기만의 울림을 더 중시한다”며 “영천처럼 자연·예술·맛이 맞닿은 곳에서 진짜 휴식을 찾는 게 요즘 여행의 본질”이라고 해석했다.

 

먹거리 역시 이 산책의 중요한 일부다. 4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송꾼만두 영천본점에서 만두를 맛본 최수민(28) 씨는 “바삭한 군만두를 한 입 베어문 순간, 어릴 때 어머니가 쪄주던 만두가 생각났다”고 고백했다. 직접 만든 단무지와 손으로 빚은 만두는 익숙함 속 특별함을 더했다. 또, 신선한 재료를 아침마다 들여 요리하는 와이식당은 재료 소진 시 일찍 문을 닫을 만큼 신선함에 집중한다. 현지인들이 꾸준히 찾는 공간임이 남다른 이유다.

 

여행 커뮤니티 반응도 흥미롭다. “영천에서는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돈된다”, “짧은 하루에도 깊은 휴식과 맛, 그리고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는 후기가 쌓인다. 어느새 모든 감각이 열리는 경험, 각자의 리듬으로 천천히 걸으며 계절을 누리는 행위가 당연한 일이 됐다는 공감도 크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여행은 목적지가 아닌, 내면의 질감과 일상의 균형을 되돌아보게 한다. 영천에서의 가을 산책은 단지 하나의 트렌드가 아니다. 그곳에서 남긴 감정과 기억, 그리고 천천히 내 안에 심어진 여유는 오랫동안 나를 이끌 특별한 흔적이 될 것이다.

정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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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안미술관#은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