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바이오

연구개발비 GDP 5퍼센트 돌파…한국, 이스라엘 뒤잇는 기술투자 강국

문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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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개발 투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에 한국이 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 5퍼센트를 넘기며 기술투자 강국 반열을 굳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24년도 연구개발활동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총 연구개발비는 131조462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보다 10퍼센트 이상 늘어난 수치다. 국내총생산 대비 비중은 5.13퍼센트로 처음 5퍼센트를 넘겼고, 국가별 순위로는 이스라엘에 이어 2위를 유지했다. 양적 규모뿐 아니라 산업 현장 중심의 개발연구 비중 확대가 병행되면서, 반도체와 바이오를 비롯한 첨단 제조·서비스 분야 전반에 구조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로 읽힌다.

 

이번 조사는 OECD 프라스카티 매뉴얼 가이드에 따라 공공연구기관, 대학, 기업 등 6만9042개 기관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공공 및 민간 영역 전체에서 집행된 연구개발비와 인력 현황을 표준화된 방식으로 분석해 국제 비교가 가능하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정부는 이 데이터를 향후 국가 연구개발 예산 배분과 전략 분야 선정, 규제 및 제도 설계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재원 구조를 보면 민간의 투자 여력이 전체 판도를 이끌고 있다. 정부와 공공 재원은 27조7672억원으로 전체의 21.2퍼센트를 차지했고, 민간과 외국 재원은 103조2790억원으로 78.8퍼센트에 달했다. 민간·외국 재원 규모가 처음 100조원을 넘기면서, 대형 제조업과 ICT, 바이오 기업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투자 확대가 통계에 본격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공 재원이 기초·원천 분야와 사회문제 해결형 과제에 집중되는 사이, 민간 재원이 상용화와 글로벌 시장 공략용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이원화 흐름이 더 뚜렷해졌다.

 

연구수행 주체별로는 기업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기업 연구개발비는 106조6988억원으로 전체의 81.4퍼센트를 차지했다. 공공연구기관은 13조2936억원으로 10.1퍼센트, 대학은 11조538억원으로 8.4퍼센트를 기록했다. 특히 매출액 상위 10개 기업의 연구개발비가 1년 만에 14조원 이상 늘어난 점이 눈에 띈다. 이들 기업의 연구개발비는 2023년 35조8721억원에서 2024년 50조1266억원으로 증가했다. 반도체, 전자, 자동차, 배터리, 제약·바이오 등 대규모 설비투자와 기술집약형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 압박이 커지면서, 연구개발 투자를 사실상 생존 비용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강화된 것으로 해석된다.

 

연구단계별 구성은 한국 연구개발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2024년 기준 기초연구는 19조2690억원으로 전체의 14.7퍼센트, 응용연구는 25조2812억원으로 19.3퍼센트를 차지했다. 개발연구는 86조4960억원으로 66퍼센트에 이른다. 전년 대비 증가율을 보면 개발연구가 11.1퍼센트로 가장 높았고, 기초연구는 8.6퍼센트, 응용연구는 7.7퍼센트 늘었다. 신약 후보물질을 상용 의약품으로 연결하거나, 차세대 반도체 공정을 실제 파운드리 라인에 적용하는 단계처럼, 시장 출시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개발 단계에 자원이 집중되는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산업계에서는 이 같은 구성이 기술 상용화 속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면서도, 장기적으로 기초연구 투자 비중이 더 낮아질 경우 원천 기술 확보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인력 측면에서는 양적 성장과 구조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2024년 총 연구원 수는 61만5063명으로 전년보다 1만1497명 증가했다. 연구보조원을 포함한 전체 연구개발인력은 83만9582명으로 1.4퍼센트 늘었다. 연구 참여 비율을 반영한 상근상당 연구원 수는 50만3346명으로 2.7퍼센트 증가했다. 상근상당 기준으로 취업자 1000명당 연구원 수는 17.6명, 인구 1000명당 연구원 수는 9.8명으로 모두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인구 감소와 제조업 경쟁 심화 속에서도, 인력 구조를 연구개발 중심으로 재편해 산업 고도화를 꾀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 유형별 분포를 보면 대기업과 벤처가 양 끝단에서 투자를 키우는 모양새다. 대기업 연구개발비는 71조4808억원으로 기업 전체의 67퍼센트를 차지했고, 중견기업은 14조2834억원으로 13.4퍼센트, 중소기업은 8조5813억원으로 8퍼센트를 기록했다. 벤처기업은 12조3533억원으로 11.6퍼센트에 달했다. 연구원 수도 대기업 14만9858명, 중견기업 7만1599명, 중소기업 10만5237명, 벤처기업 12만657명으로 집계됐다. 대기업이 대형 설비와 장주기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한편, 벤처기업이 인공지능 신약개발, 디지털 헬스케어, 반도체 설계 IP와 같은 고위험 혁신영역을 파고드는 분업 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연구 인력의 질적 구성도 바뀌고 있다. 연구수행 주체별 인력은 기업 44만7351명으로 전체의 72.7퍼센트를 차지했고, 대학은 12만974명(19.7퍼센트), 공공연구기관은 4만6738명(7.6퍼센트)이다. 학위별로는 박사 13만626명(21.2퍼센트), 석사 17만2188명(28퍼센트), 학사 28만4597명(46.3퍼센트), 기타 2만7652명(4.5퍼센트)으로 집계됐다. 특히 여성연구원 수는 14만8922명으로 늘면서 전체 연구원 중 비중이 계속 확대되는 추세다. 첨단 IT와 바이오 분야에서 다양한 배경의 연구자가 참여할수록 문제 정의와 해결 방식이 다변화된다는 점에서, 연구현장의 다양성 확대는 산업 혁신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제 비교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 구조는 첨단 산업화 전략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스라엘이 소규모 개방경제를 기반으로 민간 중심 ICT·보안·바이오 스타트업 생태계를 키우면서 GDP 대비 연구개발 비중 6퍼센트대를 유지하는 가운데, 한국은 대형 제조업과 ICT, 반도체 중심의 대기업 체제를 바탕으로 5퍼센트를 처음 넘어섰다. 미국과 유럽이 인공지능과 반도체, 나노소재, 그린테크 등 전략 분야에 대규모 공공재정을 투입하면서 민간 투자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면, 한국은 민간 주도 투자에 정부가 전략·조정 기능을 더하는 형태에 가깝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는 인공지능 반도체, 양자 기술, 차세대 배터리, 유전체 기반 정밀의료 같은 분야에서, 한국이 현재의 투자 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가 향후 10년 경쟁 구도를 가를 변수로 보고 있다.

 

정책적으로는 연구개발비와 인력의 양적 확대를 질적 성과로 연결하는 과제가 부각되고 있다. 기술혁신과 함께 데이터 규제, 인공지능 윤리, 디지털 헬스케어 인허가 제도 같은 비기술 영역의 정비가 따라가지 못할 경우, 막대한 연구개발 투자가 시장 진입 단계에서 제동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초연구 투자 비중 조정, 중견·중소·벤처의 연구 인프라 확충, 기술 사업화 지원 체계 고도화, 지역 연구거점 육성 등을 병행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은 이번 조사 결과를 OECD에 제출해 국가별 연구개발활동 비교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상세 보고서는 2026년 2월 양 기관 누리집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산업계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 연구개발 투자가 실제 시장 경쟁력과 고부가가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지, 그리고 공공·민간의 역할 분담이 어떻게 조정될지에 주목하고 있다. 기술과 자본, 인력의 방향성이 한 번 더 재편되는 시점에서, 투자 구조와 제도 환경의 균형이 새로운 성장의 조건이 되고 있다.

문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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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연구개발비#이스라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