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산사로 떠난 하루”…겨울의 정읍에서 찾은 고요한 쉼표
요즘 겨울을 핑계 삼아 조용한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겨울 여행이 스키장이나 번화한 축제를 떠올리게 했다면, 지금은 눈 덮인 산사와 고요한 정원을 찾는 이들의 계절이 됐다. 사각거리는 눈길을 천천히 걸으며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는 곳, 전북 정읍의 겨울 풍경이 그런 취향을 품고 있다.
정읍은 사계절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도시지만, 겨울이면 특히 속도를 늦추고 싶어지는 여행자들이 찾는다. 내장산 자락에 기대 선 사찰과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원, 그리고 따뜻한 찻집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동선이 하루를 온전히 채운다. 자연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여행이라기보다 잠시 삶의 숨을 고르는 시간에 가깝게 느껴진다.

먼저 발길이 향하는 곳은 내장사다. 동쪽 장군봉, 남쪽 영취봉, 서쪽 불출봉 등 여러 봉우리가 둘러싼 이 산사는 겨울이면 새하얀 눈을 이불처럼 덮어쓴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된 영은사의 자리에 들어선 뒤 오랜 세월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친 만큼, 풍경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일주문을 지나 걷다 보면 발밑에 눈이 사각거리고, 눈 덮인 전각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절벽 위 옛 벽련암지로 향하는 산길이 나온다. 사람 발길이 뜸한 겨울에는 종소리 대신 고요가 울리고, 하얀 설경 사이로 마주한 법당과 암자 터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여행자들은 “사진보다 눈으로 담는 게 더 아깝다”고 느끼곤 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어느 순간 주머니에 넣고, 그저 하얀 산사의 숨소리를 듣는 데 집중하게 된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자연과 산책을 중심에 둔 국내 여행이 꾸준히 늘면서, 사찰과 정원, 로컬 카페를 함께 찾는 이른바 ‘조용한 동선 여행’이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숙박과 대형 쇼핑보다 산책과 차 한 잔에 예산을 쓰는 여행자가 많아진 이유다. 트렌드 분석가들은 이 흐름을 “속도를 늦추는 여행”이라 부르며, 목적지보다 머무는 시간의 감정을 중시하는 방식이라고 읽는다.
내장사를 나와 정읍 시내 쪽으로 방향을 틀면 정읍구절초지방정원이 여행 동선을 자연스럽게 이어 준다. 잘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동안 겨울 정원 특유의 차분함이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꽃 대신 가지와 길, 나무의 윤곽이 도드라지는 풍경이다. 탁 트인 시야는 계절감을 더욱 또렷하게 보여 주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게 만든다.
SNS에서는 이 정원을 배경으로 한 겨울 사진이 여럿 공유된다. 눈이 쌓인 날 찾은 방문객들은 “화려하지 않아서 더 좋다”고 적고, 잎이 진 나무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찍어 올린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지만, 겨울에는 특히 ‘걷기 좋다’는 후기가 많다. 잘 관리된 길을 따라 무심코 걷다 보면, 차가운 공기와 고요한 풍경 덕에 생각이 정리됐다고 표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조금 더 여유를 누리고 싶다면 정읍오브제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전북 제8호 민간정원으로 지정된 이곳은 다채로운 식물과 조형물이 어우러진 정원이자 카페다. 겨울에도 정원 곳곳의 구조물과 식재가 어우러져 입체적인 풍경을 만든다. 잘 설계된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실내의 온기가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카페 내부에서는 탁 트인 전망을 배경으로 따뜻한 수제차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 유리창 너머로 겨울빛이 스며들고, 테이블 위에는 과일모찌와 같은 간단한 간식이 놓인다. 여행자들은 “정원을 산책하고 차를 마시는 루틴만으로도 하루가 꽉 찼다”고 고백한다. 정원과 카페가 한 공간에 공존하는 덕분에, 자연과 실내 휴식 사이를 부담 없이 오갈 수 있는 점도 매력이다.
정읍의 겨울을 더 깊이 느끼고 싶다면 마지막 코스로 찻집 차마루에 들러 보는 것도 좋다. 다양한 종류의 차를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이곳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속도가 한 박자 느려진다. 차를 우리며 퍼지는 향이 공간을 천천히 채우고, 잔을 감싼 손끝이 서서히 따뜻해진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그동안 쌓인 피로가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을 표현한다. 겨울 정읍을 하루 종일 걸으며 차갑게 식은 몸을 데우기에, 조용한 찻집만큼 든든한 마무리도 드물다.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덕분에 어느 날 찾아도 정읍의 차 문화를 경험할 수 있고, 날씨와 상관없이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피난처 같은 역할을 한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눈 오는 날 꼭 가 보고 싶다”, “걸을 곳과 쉴 곳이 함께 있어서 좋다”는 반응부터, “사진보다 공기가 더 기억에 남는 도시”라는 표현까지, 정읍을 찾은 이들은 입을 모아 ‘고요함’을 첫 번째 인상으로 남긴다. 단체 관광이나 빠른 일정보다, 조금 덜 보고 조금 더 쉬겠다는 마음으로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이런 겨울 여행 방식을 “자기를 돌보는 쉼의 연습”으로 본다. 화려한 볼거리보다 설경을 바라보며 걷는 시간을 택하고, 빠른 이동보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선택 속에서 달라진 삶의 태도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효율보다 감정, 체크리스트보다 여유가 앞서는 방식이다.
정읍의 내장사, 정읍구절초지방정원, 정읍오브제, 차마루를 잇는 겨울의 하루는 거창한 이벤트는 없다. 눈길을 걷고, 정원을 산책하고, 차 한 잔에 마음을 풀어 놓는 소소한 동선이 전부다. 그렇지만 그 작은 루틴 속에서 “이 정도 속도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안도를 느끼게 된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찻잔이 공존하는 정읍의 겨울은,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온도와 속도를 천천히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나답게 쉬고 다시 걸어갈 것인가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