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로 재난 선제 대응"…정부, ASAP 챌린지로 민간확산 속도전
과학기술 기반 재난 대응 기술이 국민안전 정책의 전면으로 올라오고 있다. 정부가 그동안 축적해온 재난·안전 연구개발 성과를 실제 제품과 서비스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하면서, 민간 투자와 현장 수요를 연계한 새로운 R&D 전환 모델이 주목된다. 자연재해와 사회재난이 복합적으로 고도화되는 상황에서, 조기예측과 신속대응을 위한 핵심 기술을 선제적으로 규정하고 전략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구상도 병행된다. 업계와 연구계에서는 이번 행사를 과학기술 중심 국민안전 대응체계 전환의 분기점으로 보는 시각도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6일 서울 KT&G 상상플래닛에서 국민안전 긴급대응 ASAP 챌린지를 열고, 그간 추진해 온 국민안전 대응 연구개발 사업의 주요 성과와 향후 추진전략을 공개했다. 행사에는 국민안전 분야 연구기관과 대학, 스타트업, 민간 공익재단, 벤처캐피털 등이 참석해 재난 대응 기술의 상용화 방안을 논의했다. 과기정통부가 재난·안전 R&D를 단순 과제 수행에서 실제 현장 적용과 민간 확산 중심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행사 1부에서는 국민안전 대응 연구개발 사업을 통해 도출된 시제품 가운데 기술성숙도, 이른바 TRL이 높은 10점이 선정돼 전시됐다. TRL은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기초 연구 단계부터 실증 완료 단계까지 기술 성숙 정도를 9단계로 평가하는 도구다. 과기정통부는 이미 현장 실증이 가능한 단계에 올라선 시제품을 중심으로, 제품화와 사업화를 위한 후속 지원 방향을 모색했다.
발표는 연구자 간 경쟁 오디션 방식으로 진행됐다. 연구책임자들이 각 시제품의 기술적 강점과 실제 재난 현장에서의 활용 시나리오를 설명하고, 민간 공익재단과 벤처캐피털 관계자들로부터 상용화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컨설팅을 받았다. 재난 경보 알고리즘, 실시간 상황 인지 시스템, 구조대원의 안전을 모니터링하는 착용형 센서 기술, 화재와 붕괴 상황을 가상 환경에서 훈련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플랫폼 등 다양한 유형의 안전 기술이 논의 대상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과기정통부는 이러한 챌린지 방식을 통해 연구성과가 논문이나 보고서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재난 대응 기관과 지방자치단체, 민간 안전 서비스 기업으로 이어지는 수요 연계 구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R&D 단계에서는 인공지능과 센서 네트워크, 통신 인프라를 결합해 재난 징후를 조기에 포착하고, 상황 인식과 의사결정을 자동화하는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이제는 해당 기술을 현장에서 운용 가능한 솔루션 형태로 묶고, 인증과 보험, 유지보수까지 고려한 사업화 패키지를 마련하는 것이 과제다.
2부 전략 공청회에서는 국민안전 대응 R&D 추진전략 안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과기정통부는 앞으로 국민안전 분야 R&D를 관리 효율화와 체감 효과 극대화라는 두 축으로 재편하겠다고 설명했다. 개별 부처와 기관이 산발적으로 수행해 온 안전 관련 연구를 통합 관리하고, 실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재난 사전 방지와 피해 최소화 성과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홍수나 산불 같은 자연재해 예측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기상, 수문, 위성, 드론 데이터 등을 통합 분석하는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자체와 현장 기관의 의사결정 시간을 단축하는 방향이 거론됐다.
전략 안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는 10대 기반기술 설정이다. 과기정통부는 국민안전을 위협하는 다양한 현안을 조기예측하고 신속대응하는 데 공통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기술군을 추려 10대 기반기술 안을 마련했다. 이 기술군에는 인공지능 기반 재난 징후 탐지, 초고해상도 지리정보와 디지털 트윈을 활용한 도시 위험 시뮬레이션, 위성·레이더·IoT 센서를 연계한 다중센서 융합 관측, 실시간 통신망 복구와 비상망 구축 기술, 대규모 인명 대피를 지원하는 군중 흐름 예측 알고리즘 등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기정통부는 지난 12일 공개한 2026년 업무보고에서 이미 10대 기술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이번 ASAP 챌린지를 시작으로 전문가와 현장 기관, 산업계 의견을 추가로 반영해 내년 3월까지 최종안을 확정하겠다는 계획이다. 재난 유형별 분절된 기술 개발을 넘어, 여러 재난 상황에 공통으로 적용 가능한 플랫폼형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민안전 R&D 추진전략이 본격화되면, 기술 개발과 제도 설계의 연계도 한층 중요해질 전망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재난 발생 가능성을 예측하거나 대피 경로를 제안하는 시스템이 현장에 도입되려면, 데이터 수집과 활용에 대한 개인정보 보호 규제와 책임 소재 구분이 선행돼야 한다. 또한 드론과 로봇을 활용한 구조 지원 기술의 경우, 비가시권 비행과 자율 운항에 대한 항공·교통 규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과기정통부는 관계 부처와 협력해 규제 샌드박스와 실증 특례를 확대하고, 국민안전 분야에 특화된 인증·표준 체계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글로벌 차원에서 재난 대응 디지털 전환 경쟁이 가속되는 점도 변수다. 미국과 유럽은 인공지능과 위성 데이터, 고성능 컴퓨팅을 결합한 국토·재난 관리 플랫폼을 국가 단위에서 구축 중이며, 일본은 지진과 쓰나미 조기 경보를 위한 초고밀도 센서망과 초고속 통신 인프라 확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역시 대형 재난 상황에서의 인구 이동과 인프라 피해를 예측하는 디지털 트윈 도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방향으로 유사 플랫폼을 개발하거나 해외 기술과 연계할 경우, 수출형 안전 서비스 산업으로 확장될 여지도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국민안전 R&D가 기술 개발을 넘어 산업 생태계 형성과 직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재난 위험 평가와 보험 상품 설계, 스마트시티와 연계된 안전 인프라 구축, 산업 현장의 작업자 안전 모니터링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민간 비즈니스가 파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재난 대응 기술의 특성상 공공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만큼, 초기 시장 형성 단계에서는 정부 조달과 공공 프로젝트가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구혁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은 국민안전과 직결된 연구개발의 방향성을 민간 협업과 선제적 기반기술 개발로 요약했다. 그는 국민의 안전과 직결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기술의 역할이 매우 크다며, 앞으로 민간과의 협력을 강화해 연구성과의 현장 확산을 촉진하고, 선제적 기반 기술 개발에 대한 지원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산업계와 연구계는 이번 ASAP 챌린지를 계기로 마련될 구체적 예산과 제도 설계, 그리고 실제 재난 현장에서의 성과가 국민안전 R&D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