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정치 여론 읽는다”…연하장도 데이터로 보는 시대
인공지능과 데이터 분석 기술이 정치 커뮤니케이션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하면서, 신년 연하장 같은 전통적 수단도 디지털 타깃 전략의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최근 민경욱 전 의원이 이재명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연하장을 공개하며 정치적 해석을 덧붙이자, 정치권에서는 단순한 의전 차원을 넘어 정교한 데이터 기반 국민 분류와 메시지 설계를 둘러싼 논의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업계에서는 향후 선거 국면뿐 아니라 국정 홍보 전반에서 AI 기반 타깃 커뮤니케이션 경쟁이 본격화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민 전 의원은 12월 3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재명 대통령 명의의 신년 연하장 사진을 올리고 “무서운 일”이라는 짧은 글과 함께 “국정 홍보를 위한 가용예산이 훨씬 많으니까 가능했을까, 아니면 고도의 심리전일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자신을 “부정선거 투쟁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규정해 온 만큼, 정치적 성향이 극단적으로 갈린 인사에게까지 연하장이 도달한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앞서 대통령실은 12월 26일 “이재명 대통령이 2026년 새해를 맞아 국가 발전과 국민 생활 안정을 위해 헌신한 각계 주요 인사, 국가유공자, 사회적 배려 계층 및 외국 정상, 재외동포 등에게 신년 연하장을 보냈다”고 밝힌 바 있다. 공식 설명으로는 전통적 연말연시 의전 행사 범주에 속하지만, 수신자 구성과 범위가 어디까지 세분화돼 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데이터 과학과 정치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국내 정치권이 어느 수준까지 데이터 기반 타깃팅을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선거 캠프를 중심으로 유권자 데이터베이스를 분류하고, 인공지능을 통해 메시지 반응을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은 이미 글로벌 정당과 캠페인 조직에서 표준 전략으로 자리잡는 추세다.
기술적으로는 유권자 연령, 지역, 직업, 과거 투표 성향 같은 구조화된 데이터뿐 아니라, 소셜미디어 글과 댓글, 온라인 커뮤니티 반응 등 비정형 데이터를 통합 분석하는 방식이 주로 활용된다. 자연어 처리 기반 여론 분석 시스템이 핵심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특정 정치 이슈에 대해 긍정·부정·중립 반응과 감정 강도를 분류하고, 발화자의 정치 성향을 추정해, 각 그룹에 최적화된 메시지 톤과 채널을 산출하는 구조다.
특히 이번처럼 정치적 갈등선 양 끝단에 위치한 인물에게도 메시지가 도달한 경우, 데이터 분석 관점에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하나는 대통령실이 의전용 연하장 발송 대상을 직책·이력 중심으로 넓게 정의해 일괄 발송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반대 진영 인사도 별도의 세그먼트로 관리하면서 상징적 메시지를 보내는 전략적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다. 두 경우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데이터 관리 인프라와 리스트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
해외에서는 AI 기반 정치 타깃팅의 수준이 한 단계 더 진전된 상태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캠페인 조직은 머신러닝 기반 ‘마이크로타깃팅’ 기법을 도입해 유권자를 수십 개 이상의 세부 집단으로 분류한다. 각 집단별로 이메일, 문자, 우편, 소셜 광고, 오프라인 행사 초대 등 채널 구성을 달리하고, 메시지 문안도 세밀하게 조정한다. 영국과 캐나다 등에서는 이러한 정교한 타깃팅이 개인정보 보호와 민주주의 왜곡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정치 데이터 활용이 고도화될수록 윤리와 규제 논쟁도 함께 커진다. 특히 선거와 국정 홍보에 인공지능을 활용할 경우, 알고리즘이 정치 성향을 어떻게 분류하는지, 어떤 데이터로 학습했는지에 대한 투명성 요구가 제기된다. 특정 집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과도하게 감정적 메시지로 자극하는 ‘정치적 조작’ 우려도 해외에서 반복된 쟁점이다.
국내에서는 아직 정치 데이터와 관련한 구체적 가이드라인과 감시 체계가 초기 단계로 평가된다. 개인정보 보호법 테두리 안에서 정치적 의견을 어떻게 처리할지, 공공기관이 보유한 정보와 선거 캠프 정보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 명의의 연하장과 같은 의전 행위가 정치적 데이터 활용과 어떻게 구분돼야 하는지도 향후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AI와 데이터 분석 기술이 정치 여론을 읽고 소통 방식을 정교화하는 데 활용될 가능성은 커지고 있지만, 그만큼 투명성과 설명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권이 기술을 도입하는 속도만큼, 시민 사회와 규제 기관이 감시와 제도 설계를 따라가지 못하면 민주적 정당성 논란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산업계와 정치권, 시민 사회가 데이터와 AI를 둘러싼 기술과 윤리의 균형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향후 한국식 디지털 민주주의의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