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 숫자가 만든 15억 원의 밤”…로또 1200회, 복권은 이제 생활의 한 부분
요즘 토요일 밤마다 TV 앞에서 숫자를 세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엔 ‘한번쯤의 행운’ 정도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한 주를 마무리하는 작은 의식이자 생활의 한 장면이 됐다. 숫자 여섯 개를 고르는 일에 각자의 소망과 피로, 그리고 다음 주를 버틸 이유가 자연스럽게 얹힌다.
제1200회 로또복권 추첨에서 행운의 번호는 1, 2, 4, 16, 20, 32로 정해졌다. 6개 번호를 모두 맞춘 1등은 12명이었다. 이들은 각자 23억 5,729만 원의 당첨금을 손에 쥐게 됐다. 세금을 뺀 실수령액은 15억 7,939만 원. 누군가에겐 대출을 한 번에 털어낼 수 있는 금액이고, 누군가에겐 평생 다시 오기 어려울 ‘인생의 한 페이지’가 된다.

이번 회차 1등 당첨자 12명 가운데 10명은 자동 선택, 2명은 수동 선택으로 당첨됐다. 서울 동대문구의 편의점 ‘GS25시 휘경주공점’, 중랑구 ‘씨유 망우점2’, 인천 미추홀구 ‘황금돼지’, 대구 수성구 ‘행복한복권’, 강원 원주시 ‘탑’, 충남 아산시 ‘행운의집로또’, 경남 통영시 ‘용남복권’ 등 전국 곳곳의 동네 슈퍼와 편의점에서 ‘우리 동네 1등’이 탄생했다. 온라인 복권판매 사이트에서도 1등이 나오면서, 종이 복권과 디지털 복권이 나란히 일상의 선택지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줬다.
2등은 80명이 당첨됐다. 1등 번호 6개 중 5개와 보너스 번호 45를 맞힌 이들이고, 1인당 5,893만 원을 받는다. 세금을 제외하면 손에 남는 돈은 약 4,596만 원이다. 3등은 3,584명이었고 1인당 131만 원, 4등은 161,754명이 5만 원, 5등은 2,673,060명이 5,000원을 가져간다. 5등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에겐 “그래도 커피 값은 벌었다”며 웃어 넘길 수 있는 소소한 위로가 된다.
이런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제1200회차까지 로또 누적 판매금액은 84조 7,284억 2,526만 원에 달한다. 그중 당첨금으로 돌아간 금액은 42조 3,642억 1,263만 원이다. 20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1등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9,999명. 평균 1등 당첨금은 20억 1,828만 원이었다. 가장 많이 나온 1등 당첨금은 407억 2,295만 원, 가장 적게 나왔던 회차는 4억 593만 원이었다. 누군가에겐 상상 속 숫자였던 금액들이, 매주 토요일 현실의 통장으로 옮겨졌다.
그만큼 많은 이야기도 쌓였다. 데이터만 놓고 보면 1등 당첨자는 수만 명 중 단 한 명의 확률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번호를 고르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복권을 산다. 강원 원주에서 복권을 즐겨 산다는 40대 직장인은 “매주 5천 원이면, 일주일 동안 상상할 거리를 사는 셈이라고 느낀다”고 표현했다. 당첨 여부와 별개로, 다음 주에 대한 작은 기대를 산다는 마음이다.
전문가들은 이 흐름을 ‘소액 희망 소비’라고 부른다. 큰 투자 대신, 가벼운 금액으로 기분을 환기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담겼다는 해석이다. 심리상담 현장에서도 로또 이야기는 자주 등장한다. 상담사들은 “복권에 매달리는 마음 뒤에는 피로와 답답함이 있다”면서도 “전 재산을 걸거나 관계와 일상을 해치는 수준이 아니라면, 적당한 선에서 즐기는 상상은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고 느꼈다. 숫자 여섯 개를 통해 ‘다른 가능성의 나’를 떠올려 보는 시간 자체가 일종의 휴식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기자가 주변의 사용 패턴을 살펴보니, 로또는 어느새 세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일상 문화가 돼 있었다.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편의점에서 한 장씩 사는 30대, 주말 장 보러 가기 전 대형마트 앞 로또점에 잠시 들르는 중년 부부, 시골 버스터미널 근처 가판대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번호를 고르는 노년층까지 풍경은 다양하다. SNS에는 매주 ‘로또 인증’ 사진과 함께 “이번엔 느낌이 좋다”, “언젠간 한 번쯤” 같은 문장이 반복된다. 당첨보다 중요한 건,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꿈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숫자에도 나름의 ‘인기’가 있다. 1200회차까지 통계에서 가장 많이 추첨된 번호는 34번(204회), 12번(203회), 27번과 33번(각 202회), 13번(201회), 17번(199회) 순이다. 1, 2, 4, 16, 20, 32 등 이번 회차 당첨번호도 상위권에 속한 숫자들이 적지 않다. 다만 로또는 어디까지나 무작위 추첨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과거 통계를 살피며 나름의 ‘행운 공식’을 찾고,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간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 습관 속에는 삶을 조금이라도 예상 가능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로또는 제도상으로도 일상의 리듬을 갖고 돌아간다. 판매는 평일 내내 이어지지만, 추첨일인 토요일에는 오후 8시에 마감되고, 일요일 오전 6시까지는 잠시 멈춘다. 추첨은 매주 토요일 오후 8시 35분에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간은 하나의 주간 타임 테이블처럼 자리 잡았다. “숫자 발표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일주일이 끝난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당첨금 수령 기한이 1년이라는 점도, 로또가 ‘즉흥의 즐거움’과 ‘제도권 금융’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댓글 반응도 흥미롭다. “이번에도 5등, 그래도 다음 주가 있다”, “1등 된 사람들, 하고 싶었던 일 먼저 다 했으면 좋겠다” 같은 말들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부러움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당첨자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1등에 당첨되면 회사를 바로 그만둘까” 같은 상상을 두고 의견이 갈리지만,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은 비슷하다. “그 돈이 생기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로또는 어쩌면 돈의 이야기를 빌려 삶의 방향을 묻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20억이든, 5만 원이든, 심지어 한 푼도 당첨되지 않았더라도, 숫자를 고르는 짧은 순간 동안 사람들은 ‘나다운 삶’을 상상해 본다. 빚을 먼저 갚을지, 부모님 집을 마련해 드릴지, 아니면 지금의 일을 유지한 채 조금 더 여유를 가질지. 복권은 단지 트렌드가 아니라, 각자의 일상에 숨겨진 욕망과 희망을 비추는 작은 거울 같은 존재가 됐다.
작고 사소한 선택이지만, 우리 삶의 방향은 그 안에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토요일 밤 숫자 여섯 개에 마음을 얹어보는 경험은, 거창한 인생 역전이 아니더라도 “내일도 한 번 살아볼 만하다”는 마음을 다시 꺼내게 해 준다. 그래서 로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주말을 여는, 가장 일상적인 꿈의 형식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