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수출 1700억달러 돌파…M.AX 전략으로 7000억 재도전
반도체 경기 회복이 우리나라 수출 구조를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2024년 7000억달러 선이 무너졌던 전체 수출이 2025년 7097억달러로 반등하며 사상 처음 7000억달러를 넘겼다. 시스템반도체와 메모리를 포함한 고부가 반도체가 수출을 견인했고, 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도 버팀목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25년 이후에는 미국발 관세 압박과 유럽연합 탄소국경조정제도, 멕시코 관세 인상 등 복합 통상 리스크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제기되며, 수출 회복세가 다시 꺾일 수 있다는 우려도 맞물려 있다. 업계와 정부는 인공지능 반도체와 제조 AI 전환 전략을 앞세워 수출 구조 자체를 고도화하는 작업이 향후 통상 변수보다 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산업통상부가 발표한 2025년 연간 및 12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은 전년 대비 3.8퍼센트 증가한 7097억달러를 기록했다. 반도체와 자동차가 연간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내며 전체 수출을 끌어올렸다. 반도체 수출은 22.2퍼센트 늘어난 1734억달러로, 단일 품목 기준 사상 최고치를 새로 썼다. 2024년 4월 이후 9개월 연속 월별 최대 실적을 이어가며 글로벌 AI 서버 투자와 고대역폭 메모리 수요 확산에 직접적인 수혜를 본 결과로 해석된다. 자동차 수출도 720억달러로 소폭 증가하며 역대 최대를 경신했다. 미국향 완성차는 관세 여파로 줄었지만 하이브리드차와 중고차 수출이 이를 상쇄했다. 수출 증가에 힘입어 무역수지는 780억달러 흑자를 기록, 2017년 이후 8년 만에 최대 흑자 폭을 달성했다.

관심을 끄는 지점은 반도체 수출 구조에 있다. 서버용 D램, 고대역폭 메모리, 데이터센터용 SSD 비중이 빠르게 커지면서 AI 관련 수요가 실적을 견인했다. 미국과 중국 빅테크 기업들이 생성형 AI 서비스 확산을 위해 데이터센터를 증설하고, 이에 맞춰 연산용 GPU와 메모리 탑재량을 늘리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고성능 메모리와 첨단 패키징 수요를 대거 흡수한 셈이다. 특히 미국이 중국산 첨단 반도체 장비와 칩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온 흐름 속에서 한국과 대만 업체의 공급 비중이 커진 점도 영향을 줬다.
다만 일부에서는 2025년 반도체 호조가 관세 조치 이전 재고 확보를 위한 선주문 효과를 반영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미국이 2024년 4월을 기점으로 반도체와 관련 장비에 대한 관세 가능성을 시사하자, 글로벌 IT·통신 장비 업체와 데이터센터 사업자가 미리 조달 물량을 늘렸고, 이 물량이 지난해 한국 반도체 수출 통계에 집중 반영됐다는 해석이다. 과거 철강·자동차 분야에서 미국 관세 예고 직후 수요가 급증했다가 이후 조정 국면을 겪었던 선례가 있다는 점도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국 반도체 업계는 아직 미세공정과 첨단 패키징에서 글로벌 최상위권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공정 기반 3나노 이하 신공정과 고대역폭 메모리 양산을 통해 AI 서버용 메모리의 대역폭과 전력 효율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전략이다. 기존 범용 D램 중심 수출 구조에 비해 부가가치와 단가가 높은 제품 비중을 키우면서, 단순 출하량 감소가 곧바로 수출액 감소로 이어지지 않도록 수익 구조를 고도화하는 방향이다. 업계에서는 AI용 메모리 제품이 일반 PC·모바일용 제품보다 평균판매단가가 여러 배 높은 만큼, 수주 구조가 안정화될 경우 일정 수준의 출하 조정이 있더라도 수출액 방어가 가능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글로벌 경쟁 구도는 녹록지 않다. 메모리 분야에서는 한국과 미국, 일본 장비·소재 업체 간 공급망 협력이 강화되는 동시에, 중국 업체가 중저가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점유율을 키우고 있다. 파운드리와 시스템반도체에서는 대만 주도의 초미세공정 경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도 대규모 보조금으로 자국 설비 투자를 확대 중이다. 여기에 미중 갈등 완화 기류가 관세 확대로 인한 반사이익을 줄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고, 동시에 중국 반도체의 글로벌 시장 재진입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상반된 시나리오가 공존한다.
정책 환경도 변수다. 미국은 2024년부터 중국산 반도체에 대한 추가 관세 부과를 예고했다가 최근 일부 품목에 대해 보류로 방향을 튼 상태다. 영국 경제지들은 4월 대선 이후 주가 급락과 중국의 보복 위협, 소비자 물가 상승 우려가 미국 내 관세 동력을 약화시켰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통상 정책 기조를 보호무역 강화 쪽으로 재정비할 경우, 한국 수출기업에는 단기간에 새로운 관세 장벽이 등장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철강·알루미늄·시멘트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배터리와 일부 IT 제조 공정까지 탄소 배출량 정보 제출과 비용 부담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멕시코 관세율 인상 움직임도 북미 생산기지와 글로벌 공급망을 활용하는 국내 전자·자동차 기업들에는 부담 요인이다. 통상 환경이 복잡해질수록 첨단 반도체와 전장부품, 배터리 등 고부가 IT·바이오 연계 품목으로 수출 포트폴리오를 전환하지 못한 기업들의 리스크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제조 AI 전환 전략과 AI 반도체 육성을 수출 구조 리스크를 줄이는 해법으로 제시했다. 산업통상부가 추진 중인 M.AX 전략은 공정 설계와 품질 검사, 설비 유지보수에 인공지능을 도입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정책 패키지다.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 등 주력 제조업 생산라인에 AI 기반 설비 진단과 공정 최적화 솔루션을 도입해, 단가 경쟁력과 납기 대응 능력을 동시에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제조 현장에서 축적된 공정 데이터를 AI가 학습해 불량률을 낮추고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면, 탄소국경조정제도 같은 친환경 규제에도 보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AI 반도체 분야에서도 국내 기업과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고성능·저전력 칩 개발이 진행 중이다. 데이터센터용 GPU와 함께, 공정 제어와 품질 검사에 쓰이는 온디바이스 AI 칩 수요가 증가하면 국내 팹리스와 파운드리의 새로운 먹거리로 연결될 수 있다. 정부는 이런 첨단·신산업을 적극 육성하면서 기존 메모리 중심 반도체 수출 구조를 시스템반도체·AI 반도체까지 확장해, 통상 리스크에 대한 완충 장치를 키우겠다는 입장이다.
재정·금융 측면의 지원도 확대된다. 정부는 올해 수출기업 대상 무역보험 공급 규모를 역대 최대인 275조원 수준으로 설정했다. 관세 부과나 환율 급변, 물류 차질 등 외부 리스크에 대비해 중소·중견 기업의 리스크 관리 능력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여기에 해외 마케팅과 물류, 인증 취득 지원을 포함한 현장 애로 해소 정책을 병행해 통상 환경이 급변하더라도 수출 실적의 급락을 막는 완충 장치를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일본·유럽연합·아세안 등 주요 교역 상대국과의 전략적 파트너십도 강화해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방식의 공급망 다변화가 추진된다.
전문가들은 2년 연속 7000억달러 수출 달성과 지난해 최대 실적 경신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정부 목표가 반도체 단일 품목의 호조만으로는 달성되기 어렵다고 본다.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제조 AI 전환과 AI 반도체 육성을 통한 산업 구조 혁신이 병행되지 않으면 반도체 수요 조정 국면이 도래할 때 수출 지표가 다시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수출을 이끄는 주력 기업의 실적 회복이 국내 협력사와 중소 제조업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도록 정책 설계를 정교하게 해야 한다는 주문도 이어진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해 수출 실적을 평가하며 우리 기업과 노동자의 노고를 언급한 뒤, 수출 활력을 국내 산업 전반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업계는 제조 AI 전환과 AI 반도체 육성, 통상 다변화 전략이 실제 현장에 얼마나 빠르게 안착하느냐에 따라 반도체 중심 수출 호황이 일시적 반등에 그칠지, 새로운 성장 국면으로 이어질지가 갈릴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계는 무엇보다도 기술 경쟁력과 수출 구조 혁신이 통상 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