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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성혈관부종, 진단만 8년…조기 발견이 생명 좌우

임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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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과 손발, 복부에 이유 없는 부종이 며칠씩 반복되면 단순 알레르기가 아니라 유전성혈관부종일 수 있다. 혈관 내 염증 조절 단백질 이상으로 전신 급성 부종이 생기는 희귀질환으로, 기도 주변에 발생할 경우 질식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아 알레르기성 두드러기나 소화기 질환으로 오진되는 사례가 많고, 확진까지 평균 8년이 걸리는 것으로 보고돼 의료계가 조기 진단 체계 정비를 서두르는 분위기다.

 

유전성혈관부종은 인구 5만에서 10만 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우리나라에는 유병률을 기준으로 약 1000명 정도가 존재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2024년 희귀질환 산정특례 등록 환자는 300명 수준에 머물러 실제 환자 중 상당수가 의료체계 밖에서 방치돼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환자마다 부종 부위와 발작 빈도, 중증도가 크게 달라 정형화된 패턴을 찾기 어렵다는 점도 조기 발견의 걸림돌이다.

질환의 근본 기전은 C1 에스테라제 억제제라 불리는 혈장 단백질의 결핍 또는 기능 저하다. C1 억제제는 면역계 보체 시스템과 염증 반응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이 단백질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혈관벽을 느슨하게 만드는 물질이 과도하게 생성돼, 얼굴과 목, 장간막 등 연부조직에 국소적인 혈장 누출이 일어나고 그 결과 심한 부종이 발생한다. 일반 알레르기성 부종과 달리 가려움이나 발진이 거의 없고,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 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는 점이 차이다.

 

진단은 혈액 내 보체 관련 단백질 검사와 임상 증상, 가족력 확인을 종합해 이뤄진다. 대표적으로 C1 억제제의 농도와 기능, 보체 C4 수치를 측정하며, C1 억제제 농도가 정상범위인 14에서 40 밀리그램 매 데시리터, 활성도가 60에서 130퍼센트보다 낮게 나올 경우 의심할 수 있다. 환자의 약 75퍼센트는 부모로부터 유전되지만 25퍼센트는 가족력이 없는 돌연변이 형태로 발병해, 단일 가계 기준으로 질환을 인지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주요 증상은 특정 부위에 며칠씩 지속되는 비함요성 부종이다. 평상시에는 아무 증상이 없다가 눈 주변과 입술, 혀, 후두, 손발, 생식기, 복부 등에서 갑작스러운 발작이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후두부종이 발생하면 호흡곤란과 기도 폐색으로 이어질 수 있어, 수 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복부 부종은 격심한 복통과 구토, 설사로 나타나 급성 복증으로 오인돼 불필요한 수술로 이어지는 사례도 보고된다.

 

증상을 촉발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눈에 띄는 외상이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발작이 시작되기도 하지만, 시험이나 업무 압박과 같은 정신적 스트레스, 가벼운 타박상, 치과 치료를 포함한 각종 시술과 수술, 에스트로겐을 포함한 호르몬 제제 노출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에서는 사춘기 이후, 임신과 출산, 경구피임약 복용 시기에 발작 빈도가 증가하는 경향이 관찰된다.

 

그럼에도 유전성혈관부종은 전형적인 알레르기 반응처럼 보이기 쉬워 진단 방랑이 심각하다. 심지수 이대목동병원 알레르기내과 교수는 유전성혈관부종 환자가 평균 8년에 걸쳐 여러 의료기관을 전전하며 진단을 받지 못하는 실정을 지적했다. 반복되는 예측 불가능한 발작은 일상생활과 직장, 학업 유지에 큰 부담을 주며, 상시 응급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심리적·경제적 부담도 상당하다는 설명이다.

 

치료 전략은 크게 예방치료와 급성 발작 시 응급치료로 구분된다. 발작 빈도가 잦거나 중증도가 높은 환자에게는 장기 예방요법을 통해 C1 억제제 농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식이 활용된다. 특히 기도 주변이나 복부에서 발작이 발생했을 때는 진행 속도가 빨라 조기 개입이 필수적이다. 2018년부터 국내에는 이카티반트 아세테이트 성분의 자가투여 주사제가 급여로 도입돼, 교육을 받은 환자라면 발작 초기 집이나 직장에서 스스로 투약해 증상 악화를 막을 수 있게 됐다.

 

선진국에서는 정맥주사용 C1 억제제 보충제, 피하주사형 장기 예방제, 칼리크레인 억제제 등 다양한 표적 치료제가 도입되며 치료 옵션이 넓어지는 추세다. 국내에서도 희귀질환 산정특례와 건강보험 급여 확대를 통해 치료 접근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환자 수가 적고 질환 특성상 임상시험 설계가 까다로워 신약 도입과 급여 전환 속도가 더디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1차 진료 현장에서의 인지도 제고가 진단 격차를 줄이는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반복되는 비전형적 부종과 복통, 가족 내 유사 증상이 관찰되면 알레르기성 두드러기나 기능성 위장질환에 앞서 유전성혈관부종 여부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조기 진단을 통해 응급약을 미리 비치하고, 발작 초기 적극적인 자가투여를 시행할 수 있어야 예후를 크게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산업계와 정책 당국을 향한 과제도 남아 있다. 희귀질환 특성상 개별 환자의 경제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단 검사 비용 경감과 응급약 재고 관리 지원이 요구된다. 동시에 환자와 의료진, 구급대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과 교육 프로그램을 구축하면, 예측 불가능한 발작에 대한 대비 수준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의료계는 유전성혈관부종이 조기 진단과 적절한 약물 접근이 확보될 경우 충분히 관리 가능한 질환이라며, 제도와 인식 개선이 치료 만족도를 좌우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임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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