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헌법 영토조항 손대기 시작하면 북 대화 나올 것"…문정인, 개헌 카드 제기

오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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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를 둘러싼 근본 해법을 놓고 원로 외교·안보 인사들과 현 정부의 노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남북대화 재개 방안을 두고 남측의 헌법 영토조항 개정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향후 여야 정치권의 논쟁이 격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을 지낸 문정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재명 정부 통일외교안보정책 평가와 전망 좌담회에서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조건을 언급하며 헌법 개정 카드를 꺼냈다. 문 교수는 남북 대화 재개와 관련해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헌법 3조와 4조의 문제"라고 말했다.

현행 헌법 3조와 4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 전체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들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해석돼 왔다.

 

문 교수는 이러한 규정이 북한의 체제 인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진보 정부든 보수 정부든 남측 생각은 결국 북한 체제 전복과 흡수통일이니 상종하지 않겠다는 것이 북한 생각"이라며 "그러니 북한 입장에서는 두 개 국가로 가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렇다면 남측에서 헌법 3조 개정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하면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올 거라고 본다. 그전에는 나올 가능성이 상당히 좀 작다"고 전망했다.

 

문 교수는 영토조항을 둘러싼 인식 정리가 남북관계 전략의 출발점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헌법 3조와 관련된 두 국가론에 대한 우리의 입장 정리가 우리의 전략적 포석을 만들고 방향을 결정해 주는 것"이라며 "다른 것은 북에서 보기에 전술적 움직임이다. 전술적 움직임에 북이 반응할지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나 축소 같은 조치는 규모가 작고 단기적인 전술 대응에 그치기 때문에, 구조적 변화를 이끌기 어렵다는 취지다.

 

문 교수는 이재명 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운영 방식에도 우려를 표했다. 그는 이재명 정부에서 NSC 상임위원장을 맡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을 언급하며 "본인께서 이걸 잘한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를 하시는 건데 제가 볼 때는 조정이 좀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제가 노무현 정부에서 일할 때는 통일부 장관이 NSC 좌장을 맡았다"며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는 분명하다. 남북관계가 최우선이고 한미관계는 남북 관계에 연동된 것으로 봤다. 그러니 NSC 의장도 통일부 장관이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좌담회에 참석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도 현행 NSC 체제의 위상과 역할 분담에 문제를 제기했다. 정 전 장관은 "윤석열 정부 때 굳어진 것으로 보이는 현재 NSC 체제는 장관급 외교안보실장 밑에 차관급 실장 3명이 있다"고 짚었다. 이어 "이 차관급이 통일·외교·국방부 장관과 똑같은 급으로 참석해서 발언하고 투표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에서 부처 장관과 청와대 차관급이 동급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구조가 책임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좌담회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제시한 END 교류·관계정상화·비핵화 이니셔티브에 대한 비판도 잇따랐다. 정 전 장관은 "END로 들어갈 입구 없이 최종 결과의 이니셜만 갖다 붙여 단어가 됐다"고 평가하며 "그 END 끝이라는 단어에서 북한이 얼마나 기분 나쁘고 참 공포스러웠겠는지 역지사지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절차와 단계가 빠진 구호 중심 접근이 북한에 강한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문 교수 역시 용어 선택의 파급 효과를 경고했다. 그는 "우리가 보기에는 좋은데, 북한이나 제3자가 보기에는 북한 체제 종식을 추구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며 "대통령의 의미와 의미론적 차이가 있다.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남측이 교류와 관계정상화, 비핵화를 내세우더라도, 영어 약칭과 상징이 북한 체제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어 대화 여건 조성에 역풍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문 교수의 헌법 영토조항 개정 언급을 둘러싸고 논쟁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규정한 현행 헌법 조항을 건드리는 시도 자체를 용납하기 어렵다는 기류가 강하다. 반면 일부 진보 진영과 남북 대화론자들 사이에서는 실제 개헌 여부와 별개로, 조항의 해석과 운용 방향을 둘러싼 공개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다만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동의와 국민투표라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만큼, 정치적 합의와 사회적 공감대 없이는 추진 자체가 쉽지 않다. 여야가 첨예하게 갈라진 영토와 통일 조항을 둘러싸고 협상을 시작할지, 상징적 논쟁에 그칠지에 따라 남북관계 전략 구상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이날 좌담회를 계기로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과 외교안보 컨트롤타워 운영 방식에 대한 원로들의 문제 제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 가운데, 청와대와 국회가 어떤 방식으로 응답할지가 향후 정국의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은 헌법 3조·4조 해석과 END 이니셔티브의 수정 여부를 둘러싸고 공방을 이어가며 다음 정기국회에서 관련 논의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오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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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이재명정부#end이니셔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