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장비 828억 절감”…과기정통부, GPU 신속심의로 투자 재편
연구장비 투자 구조가 효율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올해 국가연구시설장비 심의를 마무리하며 828억원 규모의 예산을 절감했다. 중복 구축을 줄이고 전략 분야에 장비를 집중 배치한 결과로, 특히 인공지능 생태계 핵심 자원인 그래픽처리장치 GPU를 신속심의 대상으로 포함해 AI와 바이오 등 데이터 기반 연구를 빠르게 뒷받침하겠다는 구상에 힘이 실린다. 업계와 연구계에서는 예산 효율화와 첨단 인프라 확충을 동시에 겨냥한 일종의 장비 투자 전환점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과기정통부는 21일 제20회 국가연구시설장비심의위원회 상시심의를 끝으로 올해 계획된 모든 심의를 종료했다고 밝혔다. 올해 심의 대상은 1조5214억원 규모의 20개 부처 연구시설·장비 1948점이다. 이 가운데 1조4387억원, 1780점이 도입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불인정 장비는 145점, 조건부 인정은 23점으로 정리됐다. 금액 기준으로 약 828억원이 삭감 또는 조정되며 예산이 절감된 셈이다.

연구시설·장비는 연구개발 활동에 직접 사용되면서 실험과 분석에 필요한 기능과 환경을 구현하는 인프라를 의미한다. 현미경, 분석기, 시퀀서 같은 바이오·의료 장비부터 반도체 공정 장비, 고성능 컴퓨팅 서버, AI 학습용 GPU 클러스터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구축 비용이 크고 수명이 길어 한번 도입되면 장기간 국가 연구 경쟁력에 영향을 미친다.
국가연구시설장비심의위원회는 이러한 장비를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으로 도입할 때 중복 투자 여부, 수요 적정성, 활용계획 등을 검토하는 심의 기구다. 예산 편성 단계에서 본심의를 통해 대형·중형 장비의 타당성을 먼저 따지고, 이후 연중 수시로 열리는 상시심의에서 집행 과정상 변경이나 추가 수요를 점검하는 이중 구조로 운영된다. 사실상 국가 연구 인프라의 구조를 설계하는 관문 역할을 맡고 있다.
올해는 본심의 1회, 상시심의 20회 등 총 21회에 걸쳐 회의가 열렸다. 내년에도 같은 횟수의 본심의 1회, 상시심의 20회 개최가 예정돼 있다. 회의 숫자 자체보다 중요한 지점은 심의 대상과 방식의 변화다. 과기정통부는 최신 연구 경향과 전략적 필요를 반영해 GPU 등 AI 생태계 구축을 위한 장비를 신속심의 대상으로 추가했다. 기존에는 고가 대형 장비 중심으로 장기간 검토를 거치는 구조였다면, 앞으로는 AI 연구의 시간 민감성을 고려해 GPU와 관련 인프라는 신속 심의 채널을 통해 빠르게 승인을 내리는 방향으로 조정하겠다는 의미다.
GPU는 대규모 행렬 연산을 병렬 처리하는 특성상 딥러닝, 단백질 구조 예측, 신약 후보물질 설계, 유전체 분석 등 AI+바이오 융합 연구의 필수 자원으로 꼽힌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의료 영상 판독, 유전체 기반 정밀의료, 신약 개발 시뮬레이션 등에서 GPU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국내 연구기관들은 물량 확보와 예산 승인 지연을 주요 애로로 호소해 왔다. 이번 신속심의 도입은 이런 병목을 일부 해소하고, 대형 병원과 대학, 정부출연연의 AI 연구 착수를 앞당길 방안으로 평가된다.
예산 절감 효과도 단순 삭감이 아니라 재배치 성격이 강하다. 중복 장비나 활용 계획이 미흡한 장비 도입은 불인정하거나 조건부로 조정하고, 대신 AI·바이오, 반도체, 양자 등 국가 전략 분야의 인프라를 우선 지원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동일 지역에 유사 분석 장비가 이미 구축돼 있거나, 활용률이 낮은 기기가 많은 경우 신규 장비 도입은 보류하고 공동 활용 체계를 구축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는 장비 한 대당 연간 유지비·인건비까지 고려했을 때 국가 차원에서 운영 비용을 줄이고, 실제 연구 성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곳에 자원을 모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도 연구 인프라 효율화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상태다. 미국과 유럽은 국가 단위의 공유 장비 플랫폼을 구축해 대형 시설을 공동 활용하고, 중복 투자는 최소화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특히 AI 슈퍼컴퓨팅과 바이오 대형 장비는 국가 간 격차가 곧 연구 성과 차이로 이어지기 때문에, 장비의 수량뿐 아니라 활용도와 접근성을 끌어올리는 정책이 경쟁력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국가연구시설장비심의위 중심의 사전 검토와 이후 활용 현황 관리가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하는 구조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다만 현장에서는 절감액 확대가 자칫 연구자들의 장비 접근성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정 기관에 장비가 집중되면 지역 간 격차가 벌어질 수 있고, 공유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예약 대기 등으로 실험 일정이 지연될 여지도 있어서다. AI와 바이오처럼 데이터와 연산 자원이 결정적인 분야에서는 이런 지연이 연구 경쟁력의 하락으로 직결될 수 있다. 장비 투자 전략과 더불어 활용 데이터의 공개·공유, 운영 인력의 전문성 확보 같은 후속 정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박인규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연구장비 도입 심의를 단순한 예산 관리 차원이 아닌 전략적 투자 도구로 규정했다. 그는 연구장비 도입심의가 단순한 장비 확보가 아니라 국가연구개발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관점에서 진행돼 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연구장비가 기관별, 과제별로 분절되지 않고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운영·활용되도록 관리하겠다고 강조했다. 예산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실제 연구 성과 창출로 연결되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연구계에서는 내년에도 GPU 신속심의와 중복투자 차단 기조가 이어지는 만큼, 장비 구축 계획 수립 단계에서부터 기관 간 협력과 공동 활용 전략을 어떻게 짜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계와 학계, 병원, 출연연이 연계된 AI·바이오 연구 플랫폼이 구축될 경우, 장비 투자 효율화가 곧 융합 연구 가속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산업계는 이번 심의 체계가 실제 현장의 연구 속도를 높이며, 국가 연구 인프라가 시장과 기술 변화에 맞게 재편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