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안보 내재화"…과기부, 전주기 관리로 기술패권 대응
연구안보가 국가 연구개발 체계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첨단 기술 유출과 연구자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이전이 현실적인 리스크로 부각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개방형 국제공동연구를 유지하면서도 전략 기술을 지키는 이중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연구안보를 단순한 보안 규정이 아니라, 연구기획부터 성과 활용까지 전 과정을 관통하는 새로운 관리 패러다임으로 보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구혁채 제1차관이 22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주요기관 연구안보협의회를 주재했다고 밝혔다. 회의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비롯해 정부출연연구기관, 직할연구기관, 과학기술원, 전문기관 등 40개 주요 기관의 부기관장급 인사가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국내외 연구안보 정책과 관련 사례를 공유하고, 각 기관의 국제협력 현황을 점검했다. 동시에 연구현장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애로를 반영한 현장 중심 연구안보 강화 방향을 논의했다.

연구안보는 국가 연구개발 활동이 외국 정부나 기업, 비인가 세력에 의해 왜곡되거나 침해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인력 스크리닝, 해외 공동연구 파트너 검증, 연구데이터 관리, 첨단장비 반출 통제 등이 포함된다. 특히 양자정보통신, 첨단 반도체, 인공지능, 바이오 등 전략 기술 분야에서는 논문과 특허로 드러나지 않는 암묵지와 공정 노하우 보호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협의회에서 논의된 전주기 연구안보 내재화는 연구기획부터 과제 선정, 수행, 평가, 성과 확산에 이르기까지 전 단계에 보안 요소를 설계하는 방향을 뜻한다.
기술패권 경쟁이 연구현장까지 확산된 점도 정부 대응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주요국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연구비 지원 대상과 협력 상대국을 선별하고, 연구자 개인의 해외 활동까지 세밀히 들여다보는 추세다. 미국은 연구무결성 지침을 통해 해외 정부와의 비공개 계약, 이중 소속, 비공개 기술이전 등을 규제하고 있고, 유럽과 호주 역시 연구보안 가이드라인을 통해 대학과 연구기관에 자율적 관리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중국 역시 핵심기술 보호를 명분으로 정보통제와 연구데이터 관리 규제를 강화하는 양상이다.
국내에서도 인공지능, 바이오, 우주·방산, 차세대 통신 등 분야에서 해외 공동연구와 기술이전이 급증하면서 관리 난도가 높아졌다. 연구자 입장에서는 국제 공동연구와 인력 교류가 필수적인 성과 창출 수단이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전략 기술의 무분별한 외부 유출과 특정 국가 의존 심화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 특히 공동 펀딩 과제에서 연구성과의 지식재산권 배분 구조, 데이터 저장 위치, 연구장비 반출 조건 등을 명확히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늘어나고 있다. 이번 연구안보협의회가 국제협력과 보안 사이의 균형점을 찾기 위한 제도 설계 논의를 본격화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구혁채 1차관은 협의회에서 국가 연구개발 체계 전반에 연구안보 개념을 녹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연구개발 전주기에서 글로벌 수준에 부합하는 연구안보 내재화가 필요하다고 언급하며, 연구자와 연구자산을 효율적으로 보호하는 동시에 과학기술 국제협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사후 통제 중심의 보안 조치에서 벗어나, 과제 기획 단계에서부터 협력국, 협력기관, 연구데이터 처리 방식을 검토하는 선제적 관리로 전환하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이번 논의는 IT와 바이오를 포함한 첨단 분야 연구환경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 학습데이터, 환자 유전체 정보, 임상 데이터처럼 민감도가 높은 연구데이터의 국경 간 이전 문제, 클라우드 기반 연구 인프라의 데이터 주권 쟁점, 글로벌 빅테크와의 공동 연구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술 종속 우려 등이 동시에 논의 대상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각 기술 영역의 특성과 국제 규범을 반영해 차등화된 연구안보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연구 현장의 부담을 줄이면서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연구기관들은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 연구자 대상 교육 강화, 기관 내 전담 조직 확대, 국제협력 심사 절차 고도화, 디지털 기반 연구관리 시스템 도입 등을 검토하는 분위기다. 다만 과도한 규제가 젊은 연구자들의 해외 경험과 네트워크 형성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산업계에서는 글로벌 공급망과 기술협력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얽혀 있어, 개별 과제 단위의 통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지적된다.
연구안보를 국가 전략 차원의 프레임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법제 정비 가능성도 거론된다. 국가연구개발혁신법, 국가정보보안 기본지침, 첨단전략기술 보호 관련 특별법 등 기존 제도와의 정합성을 확보하는 작업이 동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연구의 자유와 학문 교류를 보장하는 헌법적 가치와의 조화도 정책 설계의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일각에서는 연구안보를 이유로 특정 국가 또는 연구자 커뮤니티를 포괄적으로 배제할 경우, 오히려 국내 연구 생태계의 개방성과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연구안보협의회는 향후 정례화돼 각 기관의 실행 성과와 현장의 애로를 공유하는 조정 창구 역할을 맡을 전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관계 부처와의 공조를 통해 첨단 전략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보다 정교한 가이드라인과 지원책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산업계와 연구계는 연구안보 강화 정책이 실제 연구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그리고 개방형 혁신 구조와 어떤 균형점을 찾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