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헬스 문해력 격차…고령층, 건강불평등 우려 커진다
디지털 헬스 앱이 걸음 수와 혈당, 혈압, 수면 등 생활 전반을 관리하는 도구로 확산되고 있지만, 정작 만성질환 위험이 높은 고령층은 활용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 정보를 디지털 환경에서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 즉 디지털 헬스 리터러시 격차가 새로운 형태의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연구진은 단말기 보급만으로는 격차를 줄이기 어렵다며, 교육과 설계, 공공 지원을 아우르는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삼성서울병원에 따르면 조주희 임상역학연구센터 교수와 윤정희 암환자 삶의 질 연구소 교수 연구팀은 국내 성인 1041명을 대상으로 디지털 헬스 리터러리 수준을 분석한 결과를 3일 공개했다. 조사 결과 성인 4명 중 1명꼴인 27.8퍼센트가 디지털 환경에서 건강 관련 정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역량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헬스 리터러시는 모바일 앱, 온라인 포털, 사회관계망서비스 등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건강 관련 정보를 탐색하고, 내용을 이해한 뒤 신뢰도를 평가해 실제 생활습관과 치료 선택에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단순 검색 능력뿐 아니라, 어떤 정보가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는지, 상업적 광고인지 구분해 비판적으로 선택하는 역량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연구는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1041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55세 미만은 온라인 설문, 55세 이상은 대면 인터뷰로 진행해 고령층의 응답 누락을 줄였다. 지역과 연령, 성별을 고려해 패널을 구성함으로써 한국 일반 성인 인구를 최대한 대표하도록 설계했다.
조사에는 연구팀이 자체 개발한 디지털 헬스 리터러시 평가도구 DHTL AQ가 사용됐다. 총 34개 문항으로 구성된 이 도구는 단순 인지도 설문이 아니라 실제 과제 수행을 기반으로 점수를 매기는 구조다. 참여자가 건강 관련 앱을 찾아 설치하는 과정, 온라인에서 정보 검색을 수행하는 단계, 정보 출처와 내용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능력, 여러 정보 가운데 적절한 선택을 내리는 비판적 판단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수치화한 것이 특징이다.
점수는 100점 만점으로 환산됐다. 전체 참여자의 평균 점수는 73.8점이었다. 이 가운데 27.8퍼센트인 289명은 디지털 헬스 리터러시 역량이 낮은 그룹으로 분류됐으며, 이들의 평균 점수는 31.5점에 그쳤다. 반대로 72.2퍼센트를 차지한 752명은 역량이 높은 그룹으로 평가됐고, 평균 점수는 90.3점으로 두 집단 간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세부 항목을 보면 격차는 더 뚜렷하다. 디지털 헬스 리터러시가 낮은 집단에서 건강 관련 앱을 직접 찾아내는 데 성공한 비율은 19.4퍼센트에 불과했다. 회원가입까지 마친 비율은 17퍼센트로 더 낮았다. 사실상 10명 중 8명 이상이 디지털 헬스 서비스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막히는 셈이다. 건강 관리 기능이 아무리 정교해도 앱 설치와 로그인 단계에서 이탈하는 구조가 확인된 것이다.
연구팀이 역량이 낮은 그룹의 특성을 심층 분석한 결과 고령층과 저소득층, 무직 등 사회적 취약 계층이 집중돼 있었다. 특히 60세 이상 집단의 취약성이 두드러졌다. 60대 이상 250명 중 디지털 건강 문해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 사람은 55명으로 22퍼센트에 그쳤다. 20대와 30대, 40대와 50대에서 역량이 높은 사람이 다수를 차지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연구진은 연령이 높을수록 스마트폰 사용 경험과 디지털 기기에 대한 친숙도가 떨어지는 데다, 건강 관련 정보를 전통적인 대면 진료나 종이 안내문을 통해 주로 접해 온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고 있다. 특히 만성질환을 관리해야 하는 고령층에서 디지털 헬스 리터러시가 낮게 나타난 점은 건강 형평성 측면에서 우려가 크다고 평가했다.
월 소득 200만원 이하의 저소득층과 무직 등도 디지털 헬스 리터러시가 낮은 비율이 높았다. 고가의 스마트폰이나 데이터 요금제에 대한 부담, 안정적인 인터넷 환경 접근성의 차이, 디지털 교육 기회의 부족 등이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지목된다. 연구진은 사회경제적 취약성이 디지털 헬스 활용에서도 그대로 격차로 이어져 건강 정보 접근의 불평등을 심화하는 구조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디지털 헬스 기술은 만성질환 모니터링과 재택 관리, 생활습관 개선을 돕는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혈압·혈당 기록, 복약 알림, 운동량 추적, 수면 패턴 분석 등 기능이 통합되면서 병원 밖에서의 자기 관리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에서 확인된 것처럼 디지털 헬스 리터러시가 낮은 이용자는 이런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앱 내에서 제시되는 수치와 조언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해 실제 행동 변화로 연결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국제적으로도 디지털 헬스 격차는 건강 불평등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고령층을 위한 간편 모드, 음성 안내 중심 인터페이스, 글자 크기 확대와 대조도 강화 등 고령 친화 설계가 확산되는 추세다. 일부 국가는 디지털 헬스 앱 사용을 돕는 교육 프로그램을 보건소와 지역 커뮤니티 센터에서 운영하며, 의료진이 진료 현장에서 앱 설치와 기본 사용법을 함께 안내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연구를 주관한 조주희 교수는 조사 결과에 대해 건강 정보를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활용하는 역량 자체에서 격차가 발생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건강 상태와 진료 이용의 차이로 이어질 여지가 크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고령층과 취약계층에 맞춘 맞춤형 디지털 역량 강화 교육, 복잡한 메뉴 구조를 최소화한 직관적이고 단순한 앱 설계, 검증된 건강정보만을 선별적으로 제공하는 공적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또 디지털 헬스 격차 해소를 위해서는 기기 보급을 넘어서는 종합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교육 프로그램 확대와 공공 차원의 디지털 접근성 지원, 의료 현장에서의 맞춤 안내 서비스 도입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기술을 활용하는 능력 자체가 건강을 지키는 능력과 직결될 수 있는 만큼, 취약계층을 위한 정책적 지원 논의가 더 활발해져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이번 연구는 질병관리청과 보건복지부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으며, 디지털 헬스 분야 국제 학술지 저널 오브 메디컬 인터넷 리서치에 게재됐다. 산업계와 의료계에서는 디지털 헬스 서비스가 실제로 건강 형평성 개선에 기여할지, 아니면 격차를 더 벌리는 요인이 될지에 따라 향후 정책과 시장 전략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계는 이번 연구 결과를 계기로 고령층과 취약계층에 초점을 맞춘 서비스 설계와 공공과의 협력을 강화할지 주시하고 있다.
